자가격리 사흘째다. 약간의 목감기 기운으로 PCR 검사 후 양성 판정을 받고 10일의 자택 자가격리 명령을 받았다. 증상은 여전히 감기 수준인데 홀로 거주하며바깥출입을 금지당하고 보니 감옥이 따로 없다. 다섯 중에 하나는 감염되는 코로나에 안 걸리는 사람은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치부하는 세상에 다행(?)이라고 자위해야 하나. 스스로 건강관리를 잘 하지 못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있으니 미안할 따름이다. 일요일임에도 보건소 검사 현장에 출근하여 수고하고 계시는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내어본다. 무성기(無憂城記)②공
경칩이 지나서 지금 농촌 들녘은 복숭아나무 등 가지치기와 논·밭갈이로 분주하다. 그래서인지 여느 때보다 도로상에 경운기, 트랙터 등 농기계가 자주 나타난다. 농사의 편의를 위하여 제작된 농기계들은 교통수단인 차량보다는 도로상에 위험방지를 위하여 작동되어야 하는 조향·제동장치가 더디고 원활하지 못한 취약점이 있다. 최근 들어 관내에는 교통사망 사고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가 증가하는 추세로 그런 사고를 접할 때마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경찰관으로서 마음이 상당히 무겁다. 교통사고가 빈번하거나 교통 취약지 도로상에서 교통사고
산남의진의 출발은 정환직 선생이다. 1905년 당시정황들을 여러 가지로 유추 상상해볼 수 있겠거니와 산남창의지의 기록에 근거하면, ‘짐망 화천지수(朕望和泉之水)’라는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들어 정환직 선생이 아들 정용기를 영남에 보내어 의병을 일으켰다.정용기 선생이 고향인 영천 검단동에 창의소(倡義所)를 마련하니 영남일대 지사들이 호응하였고, 총을 가진 포수들은 의무적으로 참여케 하는 등 1,000여 명이 운집하였다. 정용기 선생이 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진영의 이름을 산남의진 짓고, 북진하여 고종황제를 왜적으로부터 보호하자는 목표 아
지금 고통과 시련에 빠져 번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무시겁래 지어온 악업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듯 캄캄한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지나야 새벽이 오고 햇살이 퍼지듯이 시름의 꺼풀이 벗겨지면 반드시 화사한 날이 돌아올 것이다.앞으로 연재될 글에는 가장 시급한 문제들 때문에 번민하는 분들을 위하여 세상을 바꾸는 지혜는 무엇인지, 행복을 일구는 좋은 생각이 무엇인지,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거룩한 공덕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법문이 들어 있으며, 아울러 피안을 향하여 끊임없는 행원을 다하는 불자들이 되시라는 의미에
지난 해 국가보훈처와 영천시의 후원에 힘입어 ‘역주산남의진역사’를 발간했는데, 대체로 글자체가 너무 적고 전문가용이라 쉽게 읽기 어렵다는 평이다. 해서 올해는 소설 형태의 ‘산남의진뎐(傳)’을 만들어보고자 작가섭외도 하고 제작비의 1/3에 해당하는 국비 1천만원을확보했다. 이제 경상북도의 후원을 받기 위한 노력을 하면서 아울러 일반 국민들이 의병의 군자금을 모금했듯이십시일반 후원으로 제작비를 마련할 수 있기를 꿈꾼다. 산남창의지 해제(解題) 241946년 해방을 맞아 ‘광복회’ 주관으로 산남의진 전순장병의 위령제를거행하고 이순구(李
지금 고통과 시련에 빠져 번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무시겁래 지어온 악업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듯 캄캄한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지나야 새벽이 오고 햇살이 퍼지듯이 시름의꺼풀이 벗겨지면 반드시 화사한 날이 돌아올 것이다.앞으로 연재될 글에는 가장 시급한 문제들 때문에번민하는 분들을 위하여 세상을 바꾸는 지혜는 무엇인지, 행복을 일구는 좋은 생각이 무엇인지,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거룩한 공덕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법문이 들어 있으며, 아울러 피안을 향하여 끊임없는행원을 다하는 불자들이 되시라는 의미에서 부처
지금 고통과 시련에 빠져 번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무시겁래 지어온 악업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듯 캄캄한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지나야 새벽이 오고 햇살이 퍼지듯이 시름의 꺼풀이 벗겨지면 반드시 화사한 날이 돌아올 것이다. 앞으로 연재될 글에는 가장 시급한 문제들 때문에 번민하는 분들을 위하여 세상을 바꾸는 지혜는 무엇인지, 행복을 일구는 좋은 생각이 무엇인지,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거룩한 공덕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법문이 들어 있으며, 아울러 피안을 향하여 끊임없는 행원을 다하는 불자들이 되시라는 의미
산남창의지 해제(解題) 21코로나19가 잠식한 세월…. 3년째에 접어들었으나 창궐(猖獗)하는 전염병은 숙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점점 온 세상에 만연해가고 있다. 이제 더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마는듯하다. 밥벌이 일은 손을 놓은 지 오래고, 차라리 산천경개(山川景槪)나 유람해보는 것이 어떨까 하여 마음 가는대로 돌아다녀본다. 그제는 우연히 청송군 안덕을 지나다가 천연기념물 제313호로 지정된 장전리 향나무 표지판을 보고 골목길을 들어섰다. 높이 8미터에 수관 폭이 25미터나 되는 나무의 위용도 대단했지만 나의 눈길은 大韓民國
산남창의지 해제(解題) ⑳ 오늘 1월 25일, 오는 6월 영천시에서 개최예정인 ‘제12회 대한민국 의병의 날 기념행사’ 개최와 관련한관계자 간담회가 열린다. 우리 영천시가 의병의 도시로써 충절의 고장임을 전국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기관이나 관계 단체뿐만 아니라5개월 동안 시민 모두의 관심을 끌어내어 이 행사에 동참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일 터이다. 이제 영천시민 모두가 임진왜란 당시 전국 최초의 복성전투로 영천성을 회복한 의병부대 창의정용군, 구한말 구국의 일념으로 창의한 산남의진의 고장임을 알고 자긍심을 가질 때이다
산남창의지 해제(解題) ⑲역사적인 사건은 역사의 흐름 위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현상계에 주어진 생주이멸(生住異滅)의 법칙이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은 생로병사(生老病死)하고 우주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인 채로 흐름 속에서 존재할 뿐이다. 모든 사건이 그러하듯이 산남의진 또한 시대의 산물이다. 그래서 산남의진의 묻혀있는 역사와 인물들을 천양하는 일의 시작은 시대적 상황들을 이해하고 고찰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3,000여 의사 중에 산남의진역사에 그 이름이 200도
산남창의지 해제(解題) ⑭군사장 허위의 작전 계획에 따르 면, 일본군의 방위망을 뚫기 위하여 각 군이 분산 진격하여 동대문 밖에 서 집결, 성내로 진격하여 들어가기 로 되어 있었다.그리하여 일부 의병 군은 세검정까지 진출하였다. 그러 나 일본군은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 치하여 미리 대기하고 있었고, 일부 는 의병의 선봉 부대를 습격하였다.동대문 밖의 혈전으로 인하여 서울 점령의 꿈은 무산되었으나 열약한 무기로 수도 탈환까지 계획한 의병 의 대작전은 경탄할만한 일이었다.의병전쟁은 1908년 이후 1910년까 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표
산남창의지 해제(解題) 17또 의병 유생들이 개화를 반대한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개화가 일제 침략의 수단, 즉 문화 침략이라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심남일은 개화의 침략적 본질을 “본시 개화는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룬다는 뜻이다. 지금의 개화는 백성을 왜적 앞에 인도하여 무릎을 꿇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난하였다. 문화 침략은 정치적·군사적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최익현은 이 점을 “북방의 오랑캐는 우리의 의관을 찢고 서쪽의 귀신은 우리의 마음을 유혹한다.”고 지적하면서 문화 침략의 중대성을 인식하였
산남창의지 해제(解題) 16라.무기와 전술의병이 사용한 기본 화기는 화승총이었다. 아주 드물게 양총(洋銃)이나 활 · 창 · 칼 등을 사용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전라남도 의병의 6%가 양총을, 94%가 화승총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강원도 의병은 27%가 양총을, 73%가 화승총을 사용했고, 함경남도에서는 양총이 35%까지 차지하는 강세를 보였다. 그런데 화승총은 사정거리가 불과 10보(步)인데다 산탄이기 때문에 치명상을 입힐 수 없는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화약과 철환(鐵丸)을 비교적 쉽게 입수할 수 있
산남창의지 해제(解題) ⑮의병전쟁이 장기전으로 돌입하자1909년 5월 한국을 병합하기로 결정한 일제는 전쟁을 하루속히 종식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 일환으로 일제는 같은 해 9월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개시하고, 이듬해 봄 황해도와 강원도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실시하였다. 특히 남한대토벌작전은 전라남도 의병에 대한 대규모의 포위 수색 작전으로 잔인무도한 살육작전을 기도하였다. 1909년 5월 목포 일본인상업회의소가 통감부에 호소한 바에 따르면, 전라남도 각지의 의병으로 말미암아 일본인은 10리길도 안전하게 걸어갈 수없었다고 한다
산남창의지 해제(解題) ⑬나. 제2차 의병전쟁제2차 의병전쟁은 일명 을사의병·정미의병이라고도 한다. 제2차 의병전쟁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 또다시 일제가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장악하려 할 때에 일어났다. 즉, 1905년 9월 러일간의 휴전이 성립될 무렵부터 시작하여 이듬해 여름까지 역시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1907년 이후에는 전국의 유생과 농민이 봉기하여 가히 독립전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큰 저항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때 일어난 의병의 중심 세력은 지방의 가난한 유생(寒士)들과 포군(砲軍), 그
2. 의병(義兵)의 역사2) 임진왜란과 의병곽재우와 더불어 경상우도에서 활약이 컸던 인물로 김면과 정인홍을 들 수 있다. 김면은 처음에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곳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거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2,000여명을 모았다. 그는 명망 있는 사족들로 유사(有司)를 정하고 곽재우와는 달리 관군과도 협조하여 원만하게 의병을 운영하였다. 그는 남명학파라는 학맥과 사상적 기반, 사족 상호간의 중첩적인 통혼에 의한 유대관계, 서당이나 향교를 통한 교우관계 등을 바탕으로 하여 백성들을 동원하였다. 그는 의병을
산남창의지 해제(解題) ⑨2. 의병(義兵)의 역사2) 임진왜란과 의병가. 신분 구성의병의 신분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어, 의병 활동을 벌이는 기간에는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장은 대개가 전직 관원으로 문반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고 무인들은 소수였다. 그리고 덕망이 있어 자기 고장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유생들도 있었다.의병을 일으키는 데 적합한 곳은 일반적으로 대부분 자기가 자란 고장이나, 지방관으로 있을 당시 선정을 베풀어 그곳 지방민들이 잘 따를 수 있는 마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