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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산남의진역사(山南義陣歷史) 51

산남창의지 해제(解題) 16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21.12.24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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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충래 전원생활체험학교장 본보 논설주간

산남창의지 해제(解題) 16

.무기와 전술

의병이 사용한 기본 화기는 화승총이었다.

아주 드물게 양총(洋銃)이나 활 · · 칼 등을 사용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전라남도 의병의 6%가 양총을, 94%가 화승총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강원도 의병은 27%가 양총을, 73%가 화승총을 사용했고, 함경남도에서는 양총이 35%까지 차지하는 강세를 보였다.

그런데 화승총은 사정거리가 불과 10()인데다 산탄이기 때문에 치명상을 입힐 수 없는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화약과 철환(鐵丸)을 비교적 쉽게 입수할 수 있다는 이점을 가지기도 하였다.

일본군의 29식 장총과 맞서 싸우는 데 가장 불리했던 점은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화승총을 쏠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의병들은 유격전과 기습작전, 또는 복병작전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초기의 의병들은 일본군과 정면 대결을 시도하고 수성전(守城戰)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불리한 것을 깨달은 뒤부터는 유격전으로 전환하였다.

예컨대, 의병장으로 이름난 이강년 · 신돌석 모두 유격전에 능란한 사람들이었다.

유격전에는 중군장(中軍將) · 좌익장 · 우익장, 그리고 선봉장 따위의 편제가 불필요하였다.

그래서 이름은 그대로 둔 채 실질적으로는 독립된 소부대로 활동하는 것이 관례였다.

산남의진을 보면, 정환직 대장의 뒤를 이은 최세윤 3대 대장은 일본의 병력이 날로 증강 되어가고 산남의진의 서울 진공작전을 위한 북상계획이 현실적으로 어려움을 인지했다.

그래서 경상도만이라도 지키기 위하여 대부대로서의 전투에서 벗어나 소부대의 유격부대로 진영을 재편하였다.

3차진영에서는 대장을 포함해서 25개였던 부서를 4차진영에서는 12개 부서로 줄였다.

그 대신에 경주·울산·흥해·포항 등은 본부가 담당하고, 청송동부 지역은 주왕산 일대에서 서종락, 청송서부 지역은 철령 일대에서 남석구,

영천북부 지역은 보현산 일대에서 이세기, 영천서부 지역은 팔공산 일대에서 우재룡이, 영천남부 지역은 구룡산 일대에서 이형표, 신녕 지역은 화산일대에서 조상환,

의성 지역은 춘산일대에서 박태종, 군위 지역은 효령 일대에서 남승하, 청도·경산 지역은 운문산 일대에서 임중호,

경산서부 지역은 주사산 일대에서 손진구, 청하·죽장·기계 지역은 북동대산 일대에서 정순기·구한서가 담당하고 각 부대들은 모두 본부와 연락을 취하여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했다.

또 의병을 지원하는 조직으로 좌종사(坐從事)가 있어 마을마다 이들이 의병에게 재정적 지원과 정보를 제공하였다.

의병은 본질적으로 민군이자 자연발생적 의용군이었다. 그러므로 상부 조직과 하부 조직이 정규군의 경우와 같지 않았다.

경기도 양구의 김봉명(金鳳鳴) 부대를 보면, 대장 김봉명, 총독 조유보(趙臾甫)로 되어 있다.

함경남도 포수군 임창근(林昌根) 부대의 경우에도 임창근이 정독(正督)인데 부독으로 차도선(車道善) · 홍범도 두 사람을 두었다.

이처럼 상부층이 집단적이었고, 하부층은 10명 미만의 인원으로 초십(哨十)을 만들어 이를 주거별로 편성하였다.

앞의 김봉명이나 임창근 부대의 경우는 물론 이밖에도 다수의 지휘부, 소수의 부대 편성이 특히 눈길을 끌고 있다.

, 전해산(全海山) 부대에서 보듯이, 선봉 · 도포(都砲) · 도십장(都什長) · 십장(什長) 등 간부를 선발할 때도 양반·상민을 구별하지 않고 재주를 시험하여 능력에 따라 임명하였다.

전해산 부대에서는 의병들에게 임금을 지불하여 민폐를 방지하는 데 힘쓰기도 하였다.

의병은 또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군가(軍歌)를 지어 사기를 올렸다.

전장에서는 북을 치거나 호다를 불어 진격 신호로 삼았다. 또 백색 의복이 전투에 불리하자 청색으로 물들인 군복을 입고 적군에 심리적인 위협을 가하는 한편 위장술을 쓰기도 하였다.

. 정치이념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모든 재야 유생이 의병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것은 지식인으로서 망천하(亡天下)’ · ‘망국가(亡國家)’의 위기를 당하여 절의(節義)하는 데 세 가지 처세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첫째 무기를 들고 저항하는 방법(擧兵), 둘째 망명하는 방법(浮海去守), 셋째 순절 또는 자정(自靖)하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의병에 참여한 유생들은 거병을 택한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먼저 상소 형식의 언론으로 저항하다가 전략을 바꾸어 무기로 저항하기로 결심한 지식인들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거병의 구호로써 처음 토적 복구를 내걸다, 이후 일제 침략자와 그에 동조하는 개화파 관료를 타도하고 이상적인 구제의 재건을 부르짖었다.

이상적인 구제란 유학 이념에 알맞은 유교적 이상 사회의 구현을 뜻하였다.

그들은 조선의 권력 구조가 유교적 정치 이념에 배치된 사이비체제라 믿었고 구제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을 단순한 구체제의 부활이라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의병 유생들은 확실히 반근대주의자들이었다.

유인석이 주장한 대로 망국의 근원은 개화 때문이지 수구 때문이 아니었다.

유인석은 우주문답(宇宙問答)에서 비록 구법(舊法)이 나라를 망쳤다고 주장하지만 망국은 개화가 행해진 뒤의 일이었다.

구법을 행하여 망국했다고 가정하더라도 어찌 개화하여 망국한 것만큼 심했겠는가.

만일, 나라 안의 상하대소인(上下大小人)이 모두 수구인(守舊人)의 마음과 같이 했더라면 나라는 혹시 망하지 않았을지 모르고, 또 망했더라도 그렇게 빨리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유인석은 개화를 반대했으나 그의 반근대주의는 유교적 입장이지 현대주의적 입장은 물론 아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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