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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산남의진역사(山南義陣歷史) 60

무우성기(無憂城記)①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22.03.27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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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의 출발은 정환직 선생이다. 1905년 당시정황들을 여러 가지로 유추 상상해볼 수 있겠거니와 산남창의지의 기록에 근거하면, ‘짐망 화천지수(朕望和泉之水)’라는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들어 정환직 선생이 아들 정용기를 영남에 보내어 의병을 일으켰다.

정용기 선생이 고향인 영천 검단동에 창의소(倡義所)를 마련하니 영남일대 지사들이 호응하였고, 총을 가진 포수들은 의무적으로 참여케 하는 등 1,000여 명이 운집하였다.

정용기 선생이 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진영의 이름을 산남의진 짓고, 북진하여 고종황제를 왜적으로부터 보호하자는 목표 아래 출전하게 된다.

그리고 4~5년에 걸쳐 정환직, 최세윤의 주장(主將)과 많은 부장들과 병사들 약 3,000여명이 피를 흘렸다.

그리고 역사는 흘러 오늘에 이르러 우리는 산남의진 선양(宣揚) 작업을 하고 있다. 산남창의지나 산남의진유사에 그 이름이 기록된 분, 서훈을 받은 200에 가까운 분들 외에도 묻혀진 수많은 의병들을 기리고 천양(闡揚)하는 일은 멈출 수 없는 산남의진 기념사업회의 의무다.

거듭 문헌들을 살피는 까닭이다. 정환직 선생의 저작을 읽으면서 의병장의 마음을 살펴볼 수 있겠다. 산남의진유사에 기록된 정환직 선생의 글 무우성기(無憂城記)를 소개한다.

 

무성기(無憂城記)

무우성 이야기-정치 강령을 사람신체에 비유하고 시대 탄식을 돈 폐단에 비유한 글 옛날 옛적 어느 시절에 무우(無憂)이라는 나라가 있었으니 성의 둑은 불과 두어 길 되고 땅의 넓이는 이십 평도 못 되었다.

그러나 그 나라의 풍속이 염치(廉恥)를 숭상하고 임금을 천군(天君)이라 하였다.

천군은 성품이 온화하여 착한 말을 잘 들었다.

또 안으로는 잡된 생각이 없어 마음에 신령함이 많고 밖으로는 사물의 이치나 도리를 분별하는 능력을 갖추었다.

자질은 타고난 기품과 성질이 뛰어나 북소리 한번 사이에온 세상을 두루 다녀올 수 있었으며,무릇 일이나 현상이 움직이거나 벌어지는 낌새와 선악의 기틀의 이치를 깊이 알아차림이 지극히 오묘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그 사람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천군은 임금이 되어 진심(盡心)이란 사람으로서 재상을 삼고 지사(志師)란 사람을 장수를 삼았으며, 도심(道心)이라는 사람으로서 중랑장을 삼고 사무사(思無私)란 사람을 헌납 관으로 임용했다.

나날이 그들과 더불어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도리를 강론하였다. 들어오면 정당한 위치에 앉아서 큰 덕을 펴고, 나가서도 마음의 끈을 놓지 않고 대도(大道)를 행하여 정책을 독려하고 다스림을 구하였다.

정신적으로 가르치고 이끌어 감화가 크게 행해지니 나라가 편안하고 백성이 편안하게 되어 상하가 서로 화목하더라.

하루는 어떤 사람이 전당(錢塘)에서 왔다하고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술책을 천군에게 아뢰었다.

그 사람의 성은공()이요 이름은 방()이라고 하는데 그 체격을 보면 머리는 구리쇠요 이마는 강철이며, 둥근 눈에 입은 정사각형으로 반듯하여 그 성명을 공방이라 하였다.

(공방-옛날 엽전의별칭) 공방은 남달리 매우 재치 있고 기교가 여러 가지라 남의 마음을 잘 조종하였다.

남을 웃길 수도 있고남을 울릴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남을 홀리는 수단에 능하여 구렁텅이에 빠뜨기도 한다.

혹은 스스로 그 가운데 하나의 이치로써 모든 것을 일관하며, 또 어떤 때는 스스로 배신하고 한 쌍의 용이 협잡하여 적백으로 나뉘기도 한다.

천백이 무리를 이루니 그렇게 될 때는 비록 어리석은 부인과 나이 어린 아이들도 그 형상을 보면 그것을 곧 좋아하고, 아무리 점잖고 엄숙한 신사일지라도 그 안면을 대하면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공방은 이 기회에 기운을 돋우고 위엄을 부리어서 모든 지방의 이권을 획득하여 거액의 자본을 모았다.

또 전국의 장사꾼들을 조사하여 털끝만한 물건이라도 모조리 세금을 착취하고 그 연후에는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세까지도 변환시킬 수 있게 하였다.

귀하고 천한 자리도 바꿀 수 있도록 하여 위로는 천군의 원래 인성한 그 마음을 마비시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막아버렸다.

공방에게는 두 아우가 있었으니 하나는 이름을 각패(各貝)라 하고 하나는 유패(有貝)라고 불리었다.

이 두 사람은 모든 사업에 중계를 잘하는 관계로 단 한 마디의 말이나 잠깐의 접대로도 손님을 압도하였다.

단 한 발자국의 걸음이라도 빌려주면 중요한 도움이 되는지라 이것들을 시켜서 권문세가에 내왕하여 권세획득을 도모하니, 그 술책에는 청백하던 재상 진심도 탁한 무리로 넘어가고 엄숙하던 장수 지수도 희롱감이 되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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