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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산남의진역사(山南義陣歷史) 50

산남창의지 해제(解題) ⑮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21.12.19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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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창의지 해제(解題) ⑮
의병전쟁이 장기전으로 돌입하자1909년 5월 한국을 병합하기로 결정한 일제는 전쟁을 하루속히 종식시킬 필요를 느꼈다. 

그 일환으로 일제는 같은 해 9월 이른바 남한대토벌작전을 개시하고, 이듬해 봄 황해도와 강원도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실시하였다. 

특히 남한대토벌작전은 전라남도 의병에 대한 대규모의 포위 수색 작전으로 잔인무도한 살육작전을 기도하였다. 

1909년 5월 목포 일본인상업회의소가 통감부에 호소한 바에 따르면, 전라남도 각지의 의병으로 말미암아 일본인은 10리길도 안전하게 걸어갈 수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의병의 험악의 정도가 오히려 이전보다 배가되어 생명·재산의 피해가 수백 건에이르고, 교통은 두절되고 농사와 상업이 위축되어 직접 · 간접의 피해가 막대하다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전라남도 의병에 대하여 일본군이대공세를 취한 것이 남한대토벌작전이다. 

이 작전은 전라남도 전체를 육로와 해상으로 완전 포위하여 동남으로 그물질하여 빗질하듯 좁혀 들어가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모두 한복으로 변장했고 모든 도민의 통행을 금지하여 이반자는 가차없이 사살하였다. 

약 2개월간에 걸쳐 감행된 도살 작전에서 심남일(沈南一)등 의병장이 사살당하고 박도경(朴道京) 등 의병장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의 의병 주력부대가 섬멸되다시피 하였다.

이어 전개된 강원·황해도 대토벌로 이 지역의 주요 의병 부대를 패배시킨 일제는 1910년 8월 한일합방을선언하였다. 

그것은 완전히 정복에의한 병합이었다. 1907∼1910년간의의병전쟁에서 특기하여야 할 사실은 노령(露領) 의병의 국내 진격작전이었다.

노령 연해주는 제정러시아의 진출기지로서 약 4만 명의 병력이극동에 배치되어 있었고, 일본군은 1개 사단 병력으로 두만강 국경을 수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병이 국내 진격작전을 시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1908년 두 차례나 노령의병이 두만강을 건너 공격했고 국내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려 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이 작전에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포함되었고, 경술국치 후 일제하에서 독립전쟁을 주장한 무단파(武斷派) 독립운동자가 많았던 일은 노령 의병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일본군의 발악적인 진압 작전에도 불구하고 국내 의병은 1910년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일제의 통계에 따르면, 1910년에 1,832명의 의병이 128회나 일본군과 교전하였고,1911년에는 271명이 41회, 1912년에는 23명이 5회, 1913년에는 40명이 3회 교전한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즉, 실제에 있어서는 3·1 운동이일어난 1919년까지 일본군은 의병을 완전히 소탕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1914년에는 최익현과 같이남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임병찬(林炳瓚) · 이인순(李寅淳) · 전용규(田鎔圭) 등 54명이 전국적인 의병봉기를 계획하다가 검거되었다. 

이사건을 독립의군부사건(獨立義軍府事件)이라 한다.

다. 신분 구성

의병전쟁의 주도 세력은 지방 유생과 농민이었다. 

물론 후기로 갈수록의병 지도층에 농민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갔지만, 지방 유생이 의병전쟁에서 완전히 물러섰다고 볼 수만은 없다. 

지방 유생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조선시대의 재야 지식인이었다.

재야 지식인은 관료 지식인과 구별되어야 한다.

유생은 과거를 거쳐 관료유생이 되거나 재야 유생으로 남았다. 

무사가 실직했을 때 낭인(浪人)이라 했듯이 재야 유생은 일종의 실직문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실직 문인이 아니라 서당을 경영하여교직자가 되어 성직자적 기능을 다하였다. 

다시 말하면, 관료 유생과 재야유생은 봉건적 사회에서의 통치자(기사)와 성직자(수도사와 교구신부) 구실을 했던 것이다. 

재야 유생은 교육과 문화의 담당자이면서 비판자의 구실을 수행하고 있었다. 

18세기의 실학자, 19세기의 위정척사론자가 모두재야 유생들이었다.

의병전쟁을 주도한 것도 물론 재야 유생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농민의 광범한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측면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유생과 농민은 사실상 이해와 의식을 같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면밀히 검토하면, 재야 유생은 의병전쟁을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동학농민전쟁이나 활빈당에도 일부 가담하여 농민적 요구를 대변하고 있었다. 

의병 · 동학 · 활빈당 등 한말농민운동에 참여한 유생들은 먼저일제 침략을 규탄하고 일제와 야합한 개화관료를 성토하여 구제(舊制)의 복고를 주장하였다. 

구제 복구라는 유생 의병의 투쟁 구호는 농민의일반적 지지를 받았으며 이 때문에농민의 의병 참여가 갈수록 늘어갔다. 

처음에는 유생군과 평민군이 분리되어 별개의 행동을 하다가 차츰통합되어갔다. 

의병 지도층에 농민의 수가 늘어갈수록 신분의 장벽이무너져갔다.유생 의병장과 평민 의병장의 비율을 가장 정확하게 나타내준 자료로는 『폭도편책(暴徒編冊)』 중의 비도상황월표(匪徒狀況月表)를들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투항 귀순 의병의 조사를 보면, 모두 29명에이르는 의병장과 부장 가운데 8명(28%)이 양반이고 21명(72%)이 농민이었다. 

일반 의병의 경우는 양반이 불과 2.7%에 지나지 않았다. 

이통계가 제2차 의병전쟁 때의 것이므로, 평민 의병장이 제1차 의병전쟁때보다 훨씬 많아졌던 것이 아닌가추측된다. 

이 추론을 근거로 의병전쟁이 유생 주도형에서 평민 주도형으로 변해갔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제1차 의병전쟁 때의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 않고 있으므로, 경우에따라서는 처음부터 평민 주도형의의병 부대가 많았다고 볼 수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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