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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산남의진역사(山南義陣歷史) 48

산남창의지 해제(解題) ⑬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21.12.09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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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창의지 해제(解題)

. 2차 의병전쟁

2차 의병전쟁은 일명 을사의병·정미의병이라고도 한다. 2차 의병전쟁은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 또다시 일제가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배권을 장악하려 할 때에 일어났다. , 19059월 러일간의 휴전이 성립될 무렵부터 시작하여 이듬해 여름까지 역시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1907년 이후에는 전국의 유생과 농민이 봉기하여 가히 독립전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큰 저항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때 일어난 의병의 중심 세력은 지방의 가난한 유생(寒士)들과 포군(砲軍), 그리고 빈농(破落戶)들이었으며, 평균 4050명 정도로 편성된 소부대들이 많았다.

이 시기에 봉기한 주요 의병장들을 보면, 원주의 원용팔(元容八), 죽산 · 안성의 박석여(朴昔如), 양근 · 여주의 이범주(李范疇), 경상도의 이유인(李裕寅) · 이하현(李夏玄) · 정환직(鄭換直) · 정용기(鄭傭其) · 최성집(崔聖執) · 신돌석(申乭錫) · 김현규(金顯奎), 전라도의 기우만 · 백낙구(白樂九) · 양한규(梁漢奎) · 고광순(高光洵) · 김동신(金東臣), 그리고 충청북도의 노병대(盧炳大)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유생 의병장으로서 가장 이름난 사람은 홍주의 민종식(閔宗植), 영천의 정환직, 태인의 최익현(崔益鉉) 등이다.

19065월 충청남도 홍주를 점령한 민종식부대 1,000여명은 여러 차례 일본 군대의 공격을 물리치고 61일 서울에서 특파된 일본군과 서로 맞섰다.

기관포대와 폭파대로 보강된 일본군을 맞아 분전한 민종식의 의병군은 을사조약 이후 가장 큰 봉기였다.

이어 최익현이 전라북도 태인에서 봉기, 남북이 상응하여 토적하려 했으나 순창에서 자진 해산한 최익현은 관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서울에 압송된 최익현은 대마도에 유배되고 단식 끝에 순사하여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크게 불러일으켰다.

이때의 의병으로 크게 주목을 받은 부대는 영해의 신돌석 부대였다. 그는 제1차 의병 때에도 종군했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 상민 출신으로서 활빈당이나 농민을 규합하여 을사의병 중에 유일하게 농민의병부대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에 신화 같은 이야기를 많이 남겨 놓았다.

이듬해 여름에 이르자 의병전쟁은 전국에 확산되어 독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 190781일 일제가 한국군을 강제 해산하자 이에 항거한 군인들과 의병이 서로 연합하여 대대적인 무장항일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한국군의 항전은 먼저 서울 시위대로부터 시작되어 원주 · 강화 등 지방 진위대로 확대되었다.

홍주 진위대는 집단 탈영을 했고, 진주 진위대도 봉기 계획을 짰다. 이들 한국군 병사는 각기 지방의 의병군에 가담하여 조직적인 항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원주 진위대는 특무정교(特務正校) 민긍호(閔肯鎬)의 지휘 아래 강원도와 충청북도 일대에서 활약했고 서울진격작전의 주축을 이루기도 하였다.

강원도 · 충청북도 · 경상북도 · 경기도에서 일어난 의병도 곧 나머지 지방으로 확대되었다. 그 결과, 일본군이 주둔한 주요 도시를 제외한 농촌이 의병 천하로 되었다.

또 각처에서 일본인이 살해되고 군아(郡衙) · 면사무소 · 경찰분파소 · 우체국, 그리고 전당포 등이 파괴되었다.

이에 놀란 일본군이 의병 토벌에 나서자 민중은 문자 그대로 선전(宣戰)없는 한일 전쟁이 벌어진 것으로 인식하였다.

일본군은 당시 함흥에 북부수비관구, 대구에 남부수비관구를 두어 한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군 해산에 대비하여 남부수비관구를 보강했고, 의병전쟁이 벌어지자 본국의 일본군까지 끌어들여 군사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일본군은 의병 토벌이라는 명분 아래 방화 · 살인 · 강간을 자행하였다.

의병을 체포하여 열탕에 삶아 죽이고 의병장의 부인을 잡아 음문에 숯불을 넣어 태워죽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이같은 일본군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의병들은 마침내 전국 의병군 13도창의군을 경기도 양주에 집결시켜 서울 공격전을 개시하였다.

1908년 음력 정월 양주에 집결한 의병군은 모두 1만 명에 달하였다.

그 중 민긍호 휘하의 강원도 의병이 8,000명에 이르렀다. 창의대장 이인영(李鱗榮), 군사장(軍師將) 허위, 그리고 전라창의대장 문태수(文泰洙), 호서의 이강년, 관동의 민긍호, 교남(嶠南)의 신돌석, 관서의 방인관(方仁寬), 관북의 정봉준(鄭鳳俊), 관동의 허위 등이 중요 진영 및 지휘관이었다.

총대장 이인영은 서울 주재 각국 공사관에 격문을 보내 의병이 국제법상 교전 단체임을 선언하고 진보와 인간성의 적인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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