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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산남의진역사(山南義陣歷史) 44

산남창의지 해제(解題) ⑨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21.10.2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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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창의지 해제(解題) ⑨

2. 의병(義兵)의 역사
2) 임진왜란과 의병


가. 신분 구성
의병의 신분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어, 의병 활동을 벌이는 기간에는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장은 대개가 전직 관원으로 문반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고 무인들은 소수였다. 그리고 덕망이 있어 자기 고장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유생들도 있었다.

의병을 일으키는 데 적합한 곳은 일반적으로 대부분 자기가 자란 고장이나, 지방관으로 있을 당시 선정을 베풀어 그곳 지방민들이 잘 따를 수 있는 마을이었다. 

이와 같은 조건을 갖춘 곳을 근거지로 하여 이를 확대, 더 넓은 지역에 걸쳐서 의병을 소모(召募)했고, 자연히 활동 무대도 넓어지게 되었다.

의병의 바탕을 이룬 것은 민족적 저항 의식이며 이를 촉발시킨 것이 의병장이었다. 또한 오랜 유교 교육을 통하여 유교의 도덕적 교훈인 근왕정신(勤王精神)이 깊이 뿌리를 내린 것도 의병 봉기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나. 활동 원칙과 규모
의병이 관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무질서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이정암(李廷馣)은 황해도 연안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의병 자원자의 성명을 ‘의병약서책(義兵約誓冊)’에 기록하였다. 

그리고 군율(軍律)로서 ① 적진에 임하여 패하여 물러가는 자는 참수한다[臨賊退敗者斬].

② 민간에 폐를 끼치는 자는 참수한다[民間作幣者斬]. 

③ 주장의 명령을 한 때라도 어기는 자는 참수한다[違主將一時之令者斬]. 

④ 군기를 누설한 자는 참수한다[漏洩軍機者斬]. 

⑤ 처음에 약속했다가 뒤에 가서 배반하는 자는 참수한다[始約終背者斬]. 

⑥ 논상할 때 적을 사살한 것을 으뜸으로 하고, 목을 베는 것을 그 다음으로 한다[論賞時射殺者爲首斬首者次]. 

⑦ 적의 재물을 획득한 자는 그 재물을 전부 상금으로 준다[得敵人財物者無遺賞給事]. 

⑧ 남의 공을 빼앗은 자는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상을 주지 않는다[奪人之功者雖有功不賞事]라는 8개 항목을 정한 것은 의병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1593년(선조 26) 정월에 명나라 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 총수는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만2600여명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 수는 의병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전해인 임진년(1592)에 비하여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그것은 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에 관군이 차츰 회복되어 의병을 절제하고 활동에도 많은 제약을 주어, 의병이 해체되거나 관군에 흡수되는 경향을 띠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활약이 컸던 의병장으로는 곽재우(郭再祐) · 고경명(高敬命) · 조헌(趙憲) · 김천일(金千鎰) · 김면(金沔) · 정인홍(鄭仁弘) · 정문부(鄭文孚) · 이정암(李廷馣) · 우성전(禹性傳) · 권응수(權應銖) · 변사정(邊士貞) · 양산숙(梁山璹) · 최경회(崔慶會) · 김덕령(金德齡) · 유팽로(柳彭老) · 유종개(柳宗介) · 이대기(李大期) · 제말(諸沫) · 홍계남(洪季男) · 손인갑(孫仁甲) · 조종도(趙宗道) · 곽준(郭䞭) · 정세아(鄭世雅) · 이봉(李逢) · 임계영(任啓英) · 고종후(高從厚) · 박춘무(朴春茂) · 김해(金垓)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다시 벼슬에 들어간 사람도 있으나, 왜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장도 있었다.

의병장의 대표적인 활약상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다. 경상도 의병
의병이 처음 일어난 곳은 왜군이 먼저 침입한 경상도 지역이며, 의병을 가장 먼저 일으킨 인물은 곽재우이다.

그는 현풍 유생으로서 경상도 의령에서 1592년 4월 22일 10여명의 가동(家童)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비단옷과 백마를 타고 스스로를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부르면서 기세를 올렸다.

그는 사재를 털어 군자금으로 삼았고, 의병의 수가 증가하자 군무 분장의 참모진을 구성한 뒤 바로 임전 태세를 갖추었다. 처음에는 관가에 방치된 무기를 가져다가 의병에게 지급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무기를 자체적으로 제조하여 보급하였다. 군량미도 처음에는 자신의 재곡이나 지역 부호들의 후원으로 해결했으나 그것만으로 부족하여 관곡으로 충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는 전략 기지로서 의령군에 위치한 세간리(世干里)와 정암진(鼎巖津)을 본거지로 삼았다. 세간리는 그가 처음 북을 치고 의병을 모집한 마을이었다. 

이곳은 낙동강과 남강이 합치는 기강(歧江)으로부터 멀리 북으로 창녕과 마주하는 낙동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였다. 

그래서 낙동강을 이용하여 병력과 군수 물자를 운반하는 왜선을 차단하여 큰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전라도로 향하는 왜적을 정암진에서 차단하여 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하였다. 그리고 이반한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이끌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일본군과 싸워 적의 낙동강 통행을 막았다. 

또 의령 · 삼가 · 합천 · 창녕 · 현풍 · 영산 등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여, 경상우도가 그의 보호 아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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