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기고] 산남의진역사(山南義陣歷史) 49

산남창의지 해제(解題) ⑭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22.01.23 11:39
  • 수정 2022.01.23 12:48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산남창의지 해제(解題) ⑭

군사장 허위의 작전 계획에 따르 면, 일본군의 방위망을 뚫기 위하여 각 군이 분산 진격하여 동대문 밖에 서 집결, 성내로 진격하여 들어가기 로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일부 의병 군은 세검정까지 진출하였다. 그러 나 일본군은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 치하여 미리 대기하고 있었고, 일부 는 의병의 선봉 부대를 습격하였다.

동대문 밖의 혈전으로 인하여 서울 점령의 꿈은 무산되었으나 열약한 무기로 수도 탈환까지 계획한 의병 의 대작전은 경탄할만한 일이었다.

의병전쟁은 1908년 이후 1910년까 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표]의 통계는 일본경찰이 낸 무 성의한 숫자이지만 대체의 추세 는 알 수 있다.

[표]의 통계로 미루 어 제2차 의병전쟁은 주로 강원·경 기이남[전투 횟수가 전체의 75.7% (1908년) 내지 88.6%(1909년)를 차 지함]에서 전개되었고, 북부 지역에 서는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것을 알 수 있다.

황해도·평안남북도·함경남 북도의 의병은 1908년에 총전투 횟 수의 24.3%, 1909년에는 11.4%를 차지한 데 불과하였다.

의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전 국의 민간인 소유의 총포화기를 압 수하였다.

이 때 함흥 관내에서 압수 된 신식 소총이 3,144정, 화승총이 1,939정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총 기를 압수당하고 있다.

이 지방에 전 통적으로 포수(砲手)가 가장 많았고, 신식 소총 역시 많았던 것을 보면, 홍범도(洪範圖)·송상봉(宋相鳳) 등 의 포수 의병의 활동이 활발했던 배 경을 알 수 있다.

이 통계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은 제2차 의병전쟁의 중심지가 처음에 는 전라남도·강원도·전라북도·황해 도·충청남도·경상북도·경상남도 등 지였다는 점이다.

특히, 강원도 의병은 1908년에 가 장 강력하였고 1909년에는 전라남 도 의병이 강력하였다.

일본군의 공 격 역시 처음에는 강원도 의병에 집 중하다가 이어 1909년에는 전라남 도 의병에 주력하였다.

이 통계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특 징은 1908년의 전투 의병수가 1909 년의 그것보다 2배 이상이나 많은 반면, 전투 횟수는 거의 비슷하다 는 점이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1 년 사이에 한 전투 당 평균 의병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초기에 의병은 대부대가 행동을 같이했지만 뒤에는 소부대로 분산되 어 활동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의병 이 이처럼 적은 병력으로 분산 활동 한 이유는 일본군의 이른바 교반작 전(攪拌作戰) 때문이었다고 추측된다.

교반작전이란 토벌군을 세분하 여 한정된 국지(局地)에 교반적 수 색을 실행하고, 전후좌우로 몇 번이 나 되풀이하여 왕래하거나 기병적 (寄兵的)인 수단을 써서 의병을 현 혹시키는 작전을 말한다.

이같은 일 본군의 작전 변경에 대응한 의병들 은 부대를 소부대로 나누어 유격전 을 벌여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 때 문에 초기에는 의병의 대부대가 지 방 중요 시·읍의 공격·점령에 성공 한 데 반하여, 후기에는 차츰 산간벽 지로 물러서서 일본군을 기습하는 작전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계속)

저작권자 © 채널경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