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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산남의진역사(山南義陣歷史) 45

산남창의지 해제(解題) ⑩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21.11.04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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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의병(義兵)의 역사
2) 임진왜란과 의병

곽재우와 더불어 경상우도에서 활약이 컸던 인물로 김면과 정인홍을 들 수 있다. 김면은 처음에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곳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거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2,000여명을 모았다. 

그는 명망 있는 사족들로 유사(有司)를 정하고 곽재우와는 달리 관군과도 협조하여 원만하게 의병을 운영하였다. 

그는 남명학파라는 학맥과 사상적 기반, 사족 상호간의 중첩적인 통혼에 의한 유대관계, 서당이나 향교를 통한 교우관계 등을 바탕으로 하여 백성들을 동원하였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거창·고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관군과 합세하여 적의 선봉을 지례에서 공격하여 격퇴시켰다. 

또 무계(茂溪)에서도 승전했으며, 후에는 성주 · 김산(金山) · 개령 부근에서도 왜적과 싸웠다.

정인홍도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성주에 침입한 일본군을 물리쳤다. 또 임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에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 · 합천 · 함안 등지를 방어하였다.

경상좌도에서 기병한 권응수는 정세아 등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영천을 탈환하였다. 그리고 학연(學淵) · 예천 · 문경 등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여, 일본군이 몹시 두려워하고 그들과 만나 싸우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김해는 임진년 9월 예안(禮安)에서 일어나 경상도 북부지방을 제압하는 등 일본군의 전라도 침입을 견제하였다.

라. 호남 의병
호남 의병은 관군이 활약하는 지역에서 일어난 까닭에 다른 지역의 의병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김천일(金千鎰)의 거의문(擧義文)이나 고경명 등의 격문에서 한결같이 공적인 국가 방위의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병들이 공적인 성격을 강조한 것은 기축옥(己丑獄)의 영향이 컸다. 즉, 자칫 잘못했다가는 역적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백성들이 안심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그러나 전라도 의병도 다른 의병과 마찬가지로 향토방위에 주목적이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호남 의병은 처음에는 여러 곳에서 일어났으나 대체적으로 고경명과 김천일을 중심으로 집결하였다.

그들은 전직 관료였고 막하(幕下)의 대부분은 재지 세력층인 유생들이었다. 의병에 참가한 신분층도 다양하여, 이해는 서로 다를 수 있었으나 왜군을 퇴치시켜야겠다는 점에서는 일치하였다.

고경명은 유팽로 등과 의병을 일으켜 담양에서 회맹(會盟)하고 의병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각 도는 물론 제주도에까지 격문을 보냈다. 근왕병을 이끌고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로 향할 무렵에 일본군이 금산(錦山)에 들어오자, 1592년 7월 9일 금산에 주둔한 왜병과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그러나 수천 명에 이른 의병들 대부분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농민들이어서 대패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고경명은 아들 인후(因厚)와 유팽로 · 안영(安瑛)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 뒤 맏아들 종후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그 해 12월에 의병을 일으켜 ‘복수군(復讐軍)’이라 칭하고, 이듬해 6월 제2차 진주성 싸움에 참가했다가 전사하였다.

김천일은 나주에 있다가 왜란을 당하여 이곳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수백 명을 이끌고 왕의 행재소로 향하다가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적의 점령하에 있는 도성에 결사대를 잠입시켜 백성들로부터 많은 군자금을 얻고, 한강변의 여러 적진을 급습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고경명이 금산 싸움에서 패몰한 이후 휘하에 있던 의병 대다수가 흩어졌지만, 재기를 모색한 예도 많았다. 흥덕의 남당 의병(南塘義兵)이나 장서의 남문 의병(南門義兵)은 그들 스스로가 다시 기병하여 의병 활동을 전개한 대표적인 예이다.

마. 충청도 의병
충청도에서는 조헌이 10여명의 유생과 함께 공주와 청주 사이를 왕래하며 의병을 모집하여, 곽재우와 거의 같은 때에 옥천에서 봉기하였다. 

이들은 차령(車嶺)에서 적에게 포위되어 공격을 받기도 했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또 온양 · 정산(定山) · 홍주 · 회덕 등 도내 여러 읍에서 의병 1,600명을 얻은 다음, 승려 의병장 영규(靈圭)가 이끄는 의승군(義僧軍) 500명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다시 금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하여 병력을 이동시켰다. 그러나 약속한 관군이 오지 않아 의병들 상당수가 흩어지고 700의사만이 남아 생사를 같이할 것을 결심하였다. 

의승장 영규도 조헌과 함께 진격하여 금산성에 육박하였다. 일본군은 후속 부대가 없음을 알고 조헌이 미처 진영을 정비하기도 전에 전 병력으로 공격해왔다. 

조헌이 인솔한 의병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적을 맞아 싸웠다. 그러나 조헌 부자와 영규, 그리고 의병들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조헌은 고경명에 이어 싸움에서 패하기는 했다. 

하지만 수차에 걸친 의병과의 싸움으로 일본군도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함에 따라, 호서 · 호남지방은 온전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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