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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나누미칼럼] 초롱꽃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16.06.07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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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식원장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
 

초롱꽃 한 떨기가 흙색의 꽃대를 길게 내밀었습니다.

초롱 같은 꽃을 너댓 개씩이나 매달아 놓고는 그늘지고 외진 풀숲에서 그 맵시와 품격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지난해에도 떨기마다 미끈하게 생긴 놈의 꽃대들이 솟구친 것들입니다.
교정의 천수봉 언저리에서 식구를 늘려 가는 초롱꽃은 개나리 넝쿨 사이에서 이제 꽤나 포기가 늘어났습니다.

알맞게 채광이 드는 솔밭에 자양분 있는 땅이라 제 살아가기에 적합한가 봅니다.
양지녘 길섶에 머물던 봄빛이 어느새 한 뼘이나 자랐습니다.
쑥잎은 말할 것도 없고 민들레, 씀바귀, 질경이, 원추리, 물경이, 돌미나리…, 눈에 익은 푸성귀들이 지난해 돋아난 그 자리에서 녹색을 더해 가고 있습니다.

비둘기 한 쌍이 내 발자국 소리에 노란 양 날개를 푸드덕거립니다.
서너 해 전에 심어 둔 꽈리, 금계국, 접시꽃, 하늘나리의 새싹을 살펴봅니다.
말라죽은 것들 속에 몇 마디씩 새잎을 내민 것들이 있어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몇 종 더 옮겨 심지 못하고 이만큼 봄을 맞은 것을 아쉬워합니다.

몸이 곱더니만 품위 있는 꽃대에서 정겹고도 복스러운 꽃을 피우더군요.
그런데 지난 5월 초에 들어서는 병사들의 잡초 베는 집낫에 걸려 그만 몸을 잃고 말았지요.
제초 작업을 하던 병사들의 눈에는 고렇게 앙징스런 꽃이 잡초로만 보였던 모양입니다.
개나리는 꽃이고 개나리 넝쿨 아래 푸른 잎 초롱은 미처 꽃이라 여기지 못했던 겁니다.
여덟 떨기 중에 오직 한 줄기가 겨우 살아남아 그렇게 꽃대를 올렸습니다.
물론 반쯤 잘려진 것들도 다시 새 움을 틔워 여름을 보리라 열심이지요.
나는 꽃을 보지 못하는 대다수의 초롱꽃에 서운함을 묻을 만큼 남은 한 떨기의 꽃대에 기대를 모읍니다.

한 주일쯤 지나면 하얀빛의 초롱이 밝혀질 것입니다.
물론 보랏빛 등불도 켜지겠지요. 세상에는 볼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니 사물은 존재하되 보고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볼 수 있는 눈, 그것이 필요하지요. 그 자리에 늘 있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측정한 시각, 사고의 틀로 분별해 내는 것이 과학 발전이라고 했던 Thomas Kuhn(토마스 쿤)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과학 혁명의 구조>란 저술을 통해 처음으로 paradigm(패러다임)이라는 학술 용어를 쓰기도 했답니다.
있는 그대로만은 부족합니다.

그것을 보는 힘, 과학적 지식으로서 패러다임이 요구됩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세상 뿐만 아니라 그 세상을 어떤 렌즈를 통해 보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렌즈가 세상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곧잘 무엇이 없다고 말합니다. 없어서 옆을 돌아보고 옆에 없으니 멀리 가서 찾으려 합니다.

“언제나 멀리 가려고만 하는가. 보라 좋은 것은 아주 가까운데 있는 걸, 그 붙잡는 법을 배우면 되는 것을”

괴테의 행복이던가요, 어설피 남아 있는 시 구절입니다.

도재이(道在邇)라 했던가요.
정말 볼 수만 있다면 나는 내 집안에 틀어박혀서 천리를 보고 우주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참 행복도 알게 되겠지요.

개나리 넝쿨 밑에서 초롱꽃이 피어나고 있는 것을 무명(無明)한 눈으로야 어찌 볼 수 있으리요.
비록 한 대궁이 남은 것이련만 그 초롱꽃대가 꽃을 활짝 피워낸 뒤에는 비로소 그것을 꽃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나도 예외가 아닙니다.
때때로 나는 그 병사들 이상으로 내가 어둡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말 답답해지지요.

꽃을 피우는 날까지 그렇게 기다릴 수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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