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연재소설] 고깔을 쓴다

한 관 식 작가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24.03.20 17:30
  • 글씨크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에어포켓(20)
다음날 표현봉의 전화를 받았다. 출근하기 이른 시간이라 약간 긴장하며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시간이 좀 그렇지? 출근길에 문방구에서 컴퍼스와 삼각자를 사오겠나? 사둔다 하고 까먹었어. 오늘 실험적인 조각에 도전해볼까 해서, 자네가 작업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머릿속에 그려진 구상은 현실화될 거야.”
사실 어젯밤 건너편 주택옥상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진 여자의 가위눌림으로 온전하게 잠을 설쳤다. 머리가 아팠고 무엇보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귀신을 봤다는 것보다 헛것을 봤다는 쪽으로 위안을 삼고 마음을 다스렸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가위눌림으로 단잠을 자지 못한 심적 갈등이, 귀신에 더 무게가 실려 있었던 것 같았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샤워기 밑에 몸을 구겨 박았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물이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튕겨져 나간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어젯밤 비온 뒤라서 그런지 거리는 청정했다. 봄 햇살도 하나같이 장난꾸러기처럼 맑았다. 아픈 머리에 무거운 눈꺼풀은 여전했지만 그나마 숨통이 트였다. 문방구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참으로 얼마 만에 방문일까. 항시 아이들로 넘쳐나던 기억들을 소환하며 출입문을 열었다. 등교하는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문방구는 너무 한산했다. 언제든지 접어도 이상할 것 없는 문방구주인은 깊은 한숨부터 내뱉었다.
“먼저 아이들이 없어요. 문방구에 혹하는 아이들은 게임에 혹하고 웬만하면 인터넷 주문으로 문방구가 한산하게 된 원인에 일조하게 되었죠.”
괜히 물어본 게 아닌가, 후회하는 내게 문방구주인이 물어왔다.
“결혼 했어요?”
“아직.”
“보기에 삼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데 결혼을 안했다니 쯧쯧. 그렇다하더라도 결혼을 했으면 왜 애를 낳을 생각을 안 하는 거야. 커가면서 쏠쏠한 재미도 재미지만 이 세상에 태어난 흔적은 다들 남겨야 할 것 아니야.”
“죄송합니다.”
무엇이 죄송한지 모르지만 무턱대고 사과한 뒤 밖으로 나왔다. 문득 서화인이 생각났다. 문방구주인의 말속에는 결혼보다는 아이를 낳지 않는 젊은 세대를 향한 비난이 더 컸다. 그렇다면 피임약을 늘 곁에 두는 서화인에게 확실히 보장된 미래와 임신에 대한 축복을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뚜렷한 직장 없이 부평초처럼 떠돌고 있는 내게 선뜻 미래를 맡길 만큼, 여전히 삐꺽거린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늘 불확실한 길 위에서 서성거릴 뿐이다.
작업실에 도착 했을 때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어젯밤 건너편 옥상에서 그 집 딸이 자살했다지 뭐야. 죽을 각오로 살면 안 될까. 난 자살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쉽고 딱하기도 하고 그냥 먹먹해져.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잖아.”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젯밤 빗속에서 본 실체는 귀신이 아니라는 것이 판명되었지만 몸이 뒤틀리도록 죄책감이 엄습했다. 옥상에서 마주한 여자가 보이지 않았을 때 밖으로 나왔어야 옳았다. 어느 정도의 부상은 감안하더라도 생명줄은 이어져있지 않았을까. 재빨리 119를 불러 대처했더라면 여자는 살아있었을 가능성은 컸을 것이다. 비겁하게 빗속과 결부된 귀신이라는 이유로 창문을 닫고 말았다. 표현봉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묵묵히 컴퍼스와 삼각자를 작업대에 올려놓고, 케냐 키리냐가 SL28 생두를 커피머신에 넣고 볶기 시작했다. -계속

 

저작권자 © 채널경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