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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145

조충래 전원생활체험학교장본보 논설주간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24.03.2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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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95
우재룡 선생의 약력은 2009년 1월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어 그 활동이 상세히 소개되었다. 한 분의 약력을 통해 그분의 활동도 알 수 있거니와 아울러 당시의 여러 가지 시대 상황들과 다른 이들의 활약도 겸하여 알 수 있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禹在龍 義士 略歷(우재룡 의사 약력) ⑨
주비단 조직 후 기나긴 수감 생활, 광복 후에는 광복회를 재건
선생은 3.1운동 후 활동을 재개하면서 임시정부와 연계하고자 했다. 이런 논의는 1919년 8, 9월부터였으나 1920년 1월에서야 구체화되었다.
선생은 1920년 임시정부로부터 ‘경성에서 주비단을 조직해 조선독립을 전개하라’는
밀명이 떨어지자 6월 주비단을 조직했다. 주비단은 광복회의 1920년대 활동이었는데, 주비단원들은 ‘광복회’를 계승한 것으로 자처하고 있었으며, 주비단 조직 이후에도 자신들을 ‘광복회원’이라 불렀으며 선생을 지도자로 여겼다.
그러나 ‘주비단’은 임시정부의 임시군사주비단 사건에 연루되어 거의 대부분 체포되었다. 선생은 논산과 서울 외에도 군산을 중심으로 자금을 모집하던 중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선생은 57세 되던 1937년 석방될 때까지 무려 16여 년의 긴 옥고를 치러야 했다.
선생은 광복이 되면서 광복회를 재건해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을 전개했던 정신을 되살려 건국사업에 참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광복회와 주비단에서 활동했던 생존지사들을 중심으로 1945년 10월 1일 서울 견지정 111번지에서 광복회를 재건했다.
12월에는 광복회 부회장이 되었으며 독립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선양사업을 실시했다.
재건 광복회는 1946년 2월 15일 경북 입암에서 ‘고산남의진순절제공위령제(故山南義陣殉節者諸公慰靈祭)’를 거행했다. 이는 광복회 재건을 주도한 선생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선생은 산남의진 출신이었고, 선생에게 가장 크게 영향을 준 정용기의 순절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재건 광복회는 이 위령제를 끝으로 1946년 3월을 해소되어 더 이상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
선생은 1955년 3월 3일(음력) 대구에서 서거하셨고, 1967년 현재의 국립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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