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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고깔을 쓴다

한 관 식 작가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24.02.21 11:30
  • 수정 2024.02.22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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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포켓(16)
서화인의 몸은 남편의 폭력을 기억하고 있었다.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움찔움찔하거나 어떤 때는 아낌없이 밀착되어 내 숨통을 죄여오는 압박감을 주기도 했다. 아마 스스로 터득한 섹스의 자세라고 넘기기에는 미안한 면이 없지 않았다. 틀림없이 불안과 공포가 내재된 몸짓이었다. 혼자만의 만족으로 외면한다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차근차근 대화로 떨쳐내 주고 싶었다. 그전의 상처와 아픔에 의해 움츠려든 섹스의 고정관념을 한 꺼풀이라도 벗겨내 주는 것이 바른길인 것 같았다.
“당신의 몸은 초등학교에서 배운 리코더, 단소, 하모니카, 멜로디언 중에 멜로디언을 닮아있어요.”
“그렇게 펑퍼짐하다 이거에요?”
“꼬여있어. 하하. 먼저 이름에서 주는 이미지가 고급스럽잖아요, 당신의 이름도 서화인, 얼마나 고급스러운지 당신만 모를걸요. 본체와 호스로 연결된 마우스피스를 불면서 건반을 눌러 소리를 내는 과정이 정말 흡사해요.”
서화인은 가만히 듣고 있지 않고 장난기 가득하게, 마우스피스 역할을 하는 혀를 순간적으로 밖으로 내미는 모습에서 온몸에 전율을 느끼게 했다. 가슴골에 얼굴을 묻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건반수가 적어 쉽게 익힐 것 같지만 음표대로 숨을 불어넣어 연주해야하므로 숨 조절을 잘해야 합니다. 오래사용하면 어지럼증도 동반할 수 있어요. 그것은 서화인사용법을 숙지한 후에 가능하겠죠.”
‘그래서?’라고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빗질해주며 서화인은 묻고 있었다.
“정확하게 눌렀다고 생각한 당신 몸의 건반이 최근 들어 더욱 더 다른 음으로 소리를 내고 있어요. 처음 당신을 안았을 때 남편의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한 음이탈이라 이해되었지만, 이제는 충분히 자유로워질 시간이 흘렀어도 경직되어있다는 것을 순간순간 느끼고 있어요. 믿음성을 주지 못한 내 잘못이 커다는 것도 압니다.”
“눈치 채셨네요. 그렇지만 영호씨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에요. 수시로 드나들던 남편의 발길을 뚝 끊기자, 이 인간 어디서 더 큰일을 계획하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공포감으로 집중이 잘 되지 않네요.”
내가 알고 있는 남편의 행방불명을 이야기해주려다가 참고 말았다. 음주 운전한 차량에 부딪힌 남편을 뒷자리에 실어 뺑소니치던 범행을, 길섶에 숨어 지켜보는 것만으로 일단락 짓고 싶은 비겁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여전히 시체가 발견되지 않는 것을 봐선 땅속에 묻거나 물속에 수장했을 것이다. 남들에게 발설하지 못할 비밀을 묻고 산다는 것은 정말 못할 짓이라 생각이 들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나도 힘껏 외치고 싶다. 대나무 숲으로 가서 비밀을 털어내면 나아지려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바람 따라 퍼져나갈 때 나가더라도.
이번에는 내가 서화인의 몸을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호스로 연결된 마우스피스를 불 듯이 서화인의 혀를 빨아 당기면서 천천히 건반을 눌렀다. 여전히 맑고 청아한 소리와는 멀지만 언젠가 진정성으로 다가가다 보면 서화인의 멜로디언이, 내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날을 위해 음표대로 숨을 불어넣는 연주를 멈추지 않으리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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