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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자양면 보현동 효자 김주헌의 이야기

인륜과 도덕이 무뎌지는 시대의 본보기가 될 보현 효자 이야기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24.02.0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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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민들을 중심으로 100년전 영천군 자양면 보현동에 살았던 효자 김주헌의 이야기를 토대로 자양면 보현리를 효자마을로 복원하기 위한 ‘효자 김주헌 공원’이 조성된다. 효자 김주헌은 불길속에 뛰어들어 아버지를 구하고 본인은 화상으로 사경을 헤매면서도 아버지의 봉약을 걱정했다. 그는 죽음을 앞에두고 그의 아내에게 “내가죽은 후에도 부모님 봉양을 내가 살아 있을 때처럼 해준다면 여한이 없다”는 간절한 유언을 남겼다.
그는 살신성인의 실천을 통해 일제치하에서 허물어져 가는 민족정기와 도덕성 회복의 교훈을 남기려고 하늘이 보낸 사자와 같은 효행의 표상 이었다. [편집자주] 

갑진년 새해 들어 자양면에서는 잊혀진 효자 이야기를 복원하려 지역민들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지난 1월 29일 보현자연수련원에서 영천 명륜회 회장직과 사단법인 대한노인회 자양면 분회장을 맡고 있는 김춘기씨가 지역민 30여 명과 함께 자양효공원(김주헌 효자비각 복원) 발기인대회를 열고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김 효자의 후손인 김용석 자양면 이장협의회장과 함께 공동추진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의성(義城) 김씨인 그가 김해(金海) 김씨인 효자 김주헌공의 효자비각을 복원하러 발 벗고 나선 것은 지역사랑과 효 정신이 남다른 것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지난해 산남의진 애국지사 정치훈·옥기 부자와 한국전쟁 참전 유공자인 정갑용 3대의 영구유택인 효충장의탑(效忠獎義塔)을 건립해 대(代)가 끊어진 외가댁의 증조부, 조부, 외숙 세 분을 모시면서 지역 유림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효자 김주헌의 효자비각 복원사업은 충효의 고장인 우리 영천에 걸맞은 일이다. 또한 복원된 효자비각은 인륜과 도덕이 무디어져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좋은 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효자비 복원과 함께 자양 효공원을 조성하고자 한다. 우선은 추진위원회가 십시일반 헌성금을 내고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성금을 모금하려 한다. 옛날부터 이런 효자에게는 나라에서 정려비(旌閭碑)를 내려 효 사상을 장려했으니, 우리 지역민이 나서서 자발적으로 추진하면 행정에서도 당연히 지원에 나서리라고 본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지역민이 동참할 수 있도록 권선문을 제작하고, 유림(儒林)의 청원을 유도해 영천시가 사업비를 책정하여 하루빨리 효공원이 조성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나타냈다. 
이날 출범한 『자양 효공원(김주헌 효자비각 복원) 조성 추진위원회』는 영천향교 국학학원 강사인 정재진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장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했다. 그가 역주(譯註)한 永陽誌(영양지)에 효자 김주헌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金周憲 金海人 慶孫從子 父癃病 夜失火 周憲跳入父出 全身爛熱 屬其妻尹氏曰 旣救父 吾死無恨 言訖而終 鄕里感其孝 報官 縣監李邁久 有讚詩」「김주헌 : 김해인 경손의 조카이다. 아버지가 융병[노인이 되어 여위는 병을 앓았는데 밤에 불이 났다. 주헌은 불이 난 아버지의 방으로 뛰어들어가 아버지를 업고 밖으로 나왔지만 온 몸에 심한 화상을 입어 그의 아내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이미 아버지는 구하고 나는 죽으니 한이 없소”라는 말을 마치고 죽었다. 향리에서 그의 효성에 감탄하여 관청에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현감 이매구가 이를 찬양한 시가 있다.」
지금의 자양면 보현리 소재 자양초등학교 보현분교 옆에 위치했으나 지금은 유실되어 사라져버린 효자비의 원문은 1926년 모성공회(慕聖公會)에서 작성한 찬양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 후손이 보관 중이다. 그 번역문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찬양문(讚揚文) : 삼가 살펴보건대, 경상도의 유자(儒者)들이 천거하니 영천군 자양면 보현동의 효자 김주헌(金周憲)이다. 선계(先系)가 김해 가락왕에서 나온 후손 안경공(安敬公)의 11대손 휘(諱) 진희(振熙)의 손자인 휘(諱) 한조(翰祚)의 아들 효자 경손(慶孫)의 조카이다. 성품이 본디 순실(純實)하고 밭 갈고 김매며 농사일에 힘써서 효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숙부께도 다름이 없었다. 좋아하는 음식을 올리고 아침저녁으로 문안하여 부모님 뜻을 받들고 극진히 봉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갑자기 화재가 나 온 집안에 불이 들었다. 그때 마침 효자는 일이 있어 이웃집에서 자다가 놀라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는데 부모님은 방 안에 있으면서 불을 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효자가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불 속에서 돌아가시면 이는 저의 큰 죄입니다.” 하고 곧장 불길을 무릅쓰고 방 안으로 들어가 늙은 아버지를 구하여 나왔다. 그런데 아버지는 비록 탈이 없었으나 자신은 온몸에 화상을 입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자 효자는 아내 윤씨를 불러 말하기를, “내가 죽고 아버지께서 사셨으니 한이 없소. 다만 내가 죽은 뒤에 부모님 봉양의 절도를 내가 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결같이 해준다면 나는 죽어도 아무런 유감이 없으리다. 이 기약 저버리지 말아주오. 저버리지 말아주오” 라고 말하고는 끝내 죽었다. 이는 하늘이 불로써 그 효성을 드러낸 것으로 다른 사람들이 미치지 못할 바가 많은 것이다. 그 행적을 따져보면 정려(旌閭)로 그 효성을 드러내야 마땅하겠으나, 자손이 빈궁하고 침체한데다 지금의 제도가 옛날과 같지 않아 적연하게 드러낼 수 없으니 떳떳한 성품을 갖춘 자로서 어찌 개탄하지 않으랴. 우리 회에 올라온 행장을 살펴보고 느낀 바 있어 먼저 인쇄하고 비각을 세우도록 하여 착함을 표창하고 아름다운 행실을 드러내는 뜻으로 삼고자 한다. 유자(儒者)들의 논의에 의거하여 이 사실을 찬양하노라.  공부자(孔夫子) 탄강(誕降) 2477년[서기 1926년]  월  일
모성공회 / 회장 판서 김종한 / 부회장 승지 김병흥 / 찬성장 판서 박기양 / 고문 보국 민병석 / 판서 민영린 / 참판 윤영구 / 참판 권익상 / 승지 김정진 / 참서 박희양 / 시종 이종태 / 참봉 김사규 / 찬의장 참령 김면조 / 도유사 주사 신현태 / 부유사 유학 송주헌 / 서무유사 위원 정재열 / 경학유사 참사 이긍복 / 곡례유사 진사 유진만 / 간사유사 교관 최승완 / 교원 문종거 / 유학 신수보 / 참봉 백남규 / 주사 전영준」
조충래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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