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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통의 보통글밥] 다사(茶師)와 대형(大兄)

심 지 훈 (경북 김천, 197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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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2.07 16:31
  • 수정 2024.02.0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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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막날, 7년간 봉직했던 두 번째 신문사 한국일보에 사직서를 낸 날, 나는 딱 2명에게 감사전화를 넣었다.
2010년 10월, 5년 2개월 머물렀던 첫 번째 신문사 영남일보에 사직서를 내고는, 일주일간 100여명에게 감사전화를 넣었다.
2명과 100명. 5년과 7년. 이 시간과 숫자 사이에는 간단하지만 깊은 깨달음이 있다. ‘사람, 그거 제아무리 용써봐야 무용하다는 것이다. 헛지랄 떤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통 글밥2>에 이어 <산남의진뎐>이 나오고, 내게는 어떤 좋은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일의 형편이 뜻하지 않게, 또 뜻한 대로 이루어지며 큰 진전을 이루었다. 
그 기분으로 며칠 전 신새벽 과거 20년 세월 동안 감사한 일들을 떠올려봤다.
‘영남일보’ ‘양보석’ ‘박천수’ ‘김윤식’ ‘신협중앙회’ 이런 분과 이런 조직이 떠올랐다.
내가 여적 먹고살 수 있는 기반은 첫 직장 영남일보다. 그 조직에서 월화수목금금금 사람을 만나면서 얼추 인간 속을 엿보고, 세상살이 실제를 만나고, 사회 운영체를 이해했다. 
세상 민심을 바닥까지 이해한 건 영남일보를 그만두고서다. 나는 감사인사로 1달여를 보냈지만, 매일 불나게 울리던 내 휴대폰은 일주일도 안돼 정적으로 돌변했다. 고장이 났나 할 정도로 도무지 울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세상 민심은 어제의 이례적 11월 한파 그 이상으로 차디찼다. 그로부터 큰 충격을 받아 우울증에 걸렸다. 
내가 앓았던 10개월 우울증은 5년 2개월이란 영남일보 전 시간의 전복이었다. 시간은 고작 5년이지만 그것이 내 사회생활 전부였기로 당시로선 내 모든 인생의 뒤집힘이었다.
그걸 뒤집어버리고 부셔버리고 해체하면서 대체 이놈의 인간 세상을 어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하는지 하는 문제, 그 문제의 답을 찾은 대가로 정신과 육체가 폭삭 주저앉아야 했다. 데미지는 엄청났다.
‘아, 인간은 내 마음 같지 않구나. 여러 질(質)이구나. 인간에 대한 기대는 그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되는 거구나. 그냥 사는 거구나. 내 할 일에 충실하면서 살아가는 거구나.’
정답은 하나였다. 나를 위한 삶을 묵묵히 일구는 거였다.
3년 뒤, 한국일보로 가서는 일이 아니라면 구태여 사람 만나는 일을 벌이지 않았다. 그 결과가 영남일보보다 2년 길었던 한국일보를 정리하고는 감사할 사람이 딱 2명뿐이었다. 
나는 영남일보를 그만두고 일순간 인간의 단절(=인간 절벽)을 극도로 경험하면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떠올렸다. 조직을 위해 산 내 인생이 아까웠고, 사람이 재산이란 착각 속에 산 내 인생이 아까웠다. 철저히 내 중심의 삶으로 새판을 짰다. 
삶의 중심을 ‘나’로 놓으면 그 삶은 단번에 단순해진다. 사람을 끊으면, 차가 끊기고, 밥이 끊기고, 술이 끊긴다. 그것들을 끊으면 나는 나인 채로 지극히 단순해진다. 자발적인 내가 되면 시야가 맑아지고 목표가 명징해진다. 진정 ‘혼자놀기’가 시작된다.
내 삶의 운위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조직 속에서 찾다가, 내 삶 속에서만 찾으면 놀랍도록 신실한 삶이 구비된다. 그 삶 속에는 소박, 근검, 절약, 근면, 성실, 신실이 뿌리내린다. 자연스레 책과 자연을 곁에 두게 된다. 사색이 깊어지게 된다.
이런 삶은 그저 강퍅한 모습으로만 비치기도 하지만, 인색하거나 옹색한 삶과는 차원이 다르다. 크고 작은 일을 분명하게 해치우는 중에 몸과 마음을 쉬이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걸 ‘내공’이라고 한다. 내공이 강한 사람은 쉬이 동요하지 않는다. 마이웨이의 법칙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첫 신문사 퇴사 이후 많은 인연이 절로 정리되었다. 그렇게 몇몇 사람이 남았다. 내 20~30대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다사(茶師·보이차 스승) 양보석 다연회장과 대형(大兄·큰형) 박천수 세종종합수산 사장이다.
양보석 선생은 한국일보 7년 동안 내 인망(人網)의 전부였다. 어쩌다 대구를 내려가면 나는 양보석 선생과 차를 마시면서 하루를 보냈다. 
박천수 형은 영남일보 재직시절(그리고 내가 야인이 되었을 때도) 음양으로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 영남일보를 그만두고 찾아가 내가 의형제를 맺자고 제안했다.
어제 두 분을 2~3년 만에 만났다. 두 분 다 내가 10년 전에 한 ‘인적 청산’을 이야기했다. 
천수 형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60억 원을 손해 보고 사업체를 정리했다. 35년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가 보다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겨우 넘었다고 했다. 
형은 그 많던 모임을 일절 끊고 오로지 사업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형은 60억 원 동산과 부동산을 정리하면서 차디찬 인심을 맛봤던 것 같다.      
양보석 선생은 36년 공직생활 마감을 앞두고 휴대폰을 1대 더 장만했다. 7,000명 가까이 저장된 기존 휴대폰은 퇴직과 동시에 끊어버리고, 새 휴대폰으로 새 인생을 살겠다고 했다. 선생은 지난 2년 5층짜리 새집을 지으면서 ‘인간 지옥’을 맛봤다고 했다.
내 다사와 대형은 ‘인간은 결국 혼자 서야 바로 선다. 자기 실력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고 내내 말하고 있었다. 사람, 그건 한 치도 기대할 게 못된다.
양 선생님은 새집 2층에 장장 30년 동안 준비해 대한민국에서 가장 특색있는 보이찻집 <보석다관>을 열었다. 이 환상적인 공간에서 단둘이 6시간 동안 다담을 나눴다. <보석다관> 한켠엔 내가 언제든 쉬어갈 수 있는 숙소도 마련해 두셨다. 그 방 윗선반엔 책이 가득이다. 
<보석다관>은 대구 수성구 2군사령부 맞은편에 있다./심보통 202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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