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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140

조충래 전원생활체험학교장본보 논설주간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24.02.07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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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이 창의된 땅 자양은 충효의 정신이 깃든 땅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그리고 산업화의 시대적 질곡을 거치면서 산남의진도, 효자에 대한 이야기도 심지어 이 땅 자양에조차 잊혀졌다. 2024년 1월 29일은 잊혀진 효자 이야기를 다시 공론화하며 보현리에 서 있던 김주헌 효자비(金周憲 孝子碑)를 복원하고 ‘효자 김주헌 공원’을 조성하자며 지역의 어른 서른 여 분이 보현자연수련원에 모여 발기(發起)하였다. ‘자양 효공원’이 충효의 정신을 기리는 공간으로 잘 조성되리라 기대하면서, 우재룡 선생에 대한 국가보훈부 홈페이지의 독립유공자 공훈록 기록을 소개한다. 의사들 중 드물게 1963년까지 생존했으므로 비교적 그의 삶이 상세한 기록으로 남았다고 볼 수 있겠다.

禹在龍 義士 略歷(우재룡 의사 약력) ⑤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우재룡禹在龍 관리번호: 3497 / 이명: 禹利見, 禹敬玉, 金在洙, 金在瑞
출생-사망: 1884.01.03.-1963.03.27./ 본적: 경상북도 경주 外東面 鹿洞 469番地
훈격(서훈년도): 독립장(1963) / 운동계열: 국내항일
공적개요:
1. 義兵將 鄭鏞基의 練兵將으로 無期流刑 (合倂때 特赦) 2. 光復團에 가입 總務, 指揮長, 軍資金募集 3. 피체되어 無期懲役언도 1937년 출옥 전후 16년간 복역 (騎驢隨筆 141p, 41p, 韓獨運史 p.92, 抗日殉國義烈士傳 p.72, 東亞日報 1922.4.14 ~ 3.27)
우재룡(禹在龍, 1884.1.3 ~ 1955.3.3) 선생은 1884년 1월 3일 경상남도 창녕군(昌寧郡)에서 단양 우씨(丹陽禹氏) 채희와 진주 강씨(晋州姜氏)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딸 다섯을 낳고 나이 마흔에 이르러 선생의 출생을 보았다. 선생의 자(字)는 이견(利見), 호(號)는 백산(白山), 고려 말 유학자였던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21세손이다. 선생의 자서전적 성격을 갖고 있는 ‘백산실기’를 통해 보면 출생지인 왕산리를 떠나 경북 청도군 풍각(豊角)으로 이주해 5년을 거주했고, 일곱 살 되던 해에 청송군 유전(楡田)으로 이주했다.
선생은 청송에서 글공부를 시작했으나 ‘성품이 쾌활하였기에 글공부에는 항심이 없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선생은 문인적 소양보다는 무인적 성향이 강했다. 이는 부친의 영향으로, 부친인 우채희는 한말 무과를 통해 사과(司果)벼슬을 역임했다. 선생은 청송에서 영천(永川)으로, 그리고 대구부 성서면 신당리(新堂里)로 이사한 후 대한제국 군대에 들어갔다. 국권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력으로 대항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선생은 1902년 대구부 진위대에 입대하여, 군대해산이 이루어지던 1907년까지 5년간 근무했다.
일제가 군대해산하자 탈영하여 의병전쟁에 참전
선생은 대구진위대에서 근무하던 중 대구 감옥에 수감된 의병장 정용기(鄭鏞基)를 만나 항일 민족 운동으로 삶의 큰 방향을 잡았다. 정용기는 부친인 고종의 측근 정환직(鄭煥直)의 명을 받들어 1905년 12월부터 고향인 영천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1906년 3월 영천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설치하고 봉기했다. 영해로 진군하여, 경주를 지나던 중 경주진위대의 간계에 속아 체포되었다. 우재룡 선생은 정용기가 수감되자 전국의 우국지사들이 찾아와 석방운동을 하는 것을 보고 그를 흠모하기 시작했으며, 나중에 의제(義弟)가 되어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한다. 선생은 대구진위대에 근무하던 중 군대해산을 맞았으나 이에 반대해 동지들과 탈영했고, 석방된 정용기가 의병을 모집한다는 소문을 듣고 청송의 산남의진을 찾아갔다. 의진에서 의심을 품고 선생 등을 조사하자 선생은 비분강개하여 “대한사람이 대한사람을 속이겠는가. 우리가 만약 그 따위 야심을 갖고 왔다면 하늘 밑에서 용서 받지 못할 것”이라고 외쳤다. 정용기는 선생 등을 불러 들여 크게 기뻐하며 의진에 편입시켰다. 선생은 1907년 7월 나이 스물넷에 의병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당시 산남의진은 산악지대를 이용해 북상하여 강원도를 거쳐 서울에 도달해 황궁을 호위하며 일본군과 일전을 벌인다는 목표를 가지고 거병했었다. 거병 초기 정용기가 체포되면서 활동이 중지되었으나 정용기가 석방되면서 다시 의진을 정비했던 것이다. 정환직은 정용기가 1906년 9월 대구 감옥에서 풀려나자 영천으로 내려와 다시 의병을 모집해 강릉으로 북진할 것을 상의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정용기는 1907년 4월 의진을 편성하였으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모병과 무기구입이 여의치 않고, 영해지역에서 활동하던 신돌석(申乭石)의병대도 일본군에 자주 패해 강릉으로의 북상은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산남의진은 1907년 7월에서야 북상을 시작할 수 있었고 선생이 산남의진에 참여한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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