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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통의 보통글밥] 깨친 者는 없다

심 지 훈 (경북 김천, 1979.7.8~)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24.01.24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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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1년 만에 모 스님을 만났다. 1년 만에 만난 것은 이 스님과는 성향이 참 안 맞아서 안 볼 생각으로 지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스님을 처음 소개한 분과의 의리 때문이었다. 
1년 만에 만난 스님은 다담(茶談)에서 ‘깨친 자’를 입에 올렸다. ‘깨우치면 둘이 하나고, 색도 공이다’는 식의 불교식 관념론을 이리저리 풀어서 이야기했다.
내가 물었다. 
“스님, 하면 깨친 자를 본 적이 있습니까? 스님은 깨친 자입니까? 깨친 자는 어떤 캐릭터여야 합니까?”
스님은 자신도 아직 덜 깨친 자라고 한 뒤, 뜬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만 또 이어갔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글쎄, 그러면 깨쳤다는 자는 어떤 모습입니까? 깨친 자는 시쳇말로 훈남입니까, 차도남입니까? 인간이 깨쳤다는 것만큼 자기 기만적인 말이 있을까요. 그거야말로 망상이고, 허상이죠. 깨쳤다면 한순간 깨쳤다고 할 수는 있겠지요. 언제? 인간은 괴롭거나 깊은 슬픔에 빠지면 저절로 깨우치는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깨친 자로 살아가는 인간은 없습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 성(聖)과 속(俗)을 그때그때 적확하게는 유불리에 따라 넘나들 뿐입니다.”
그리고 이 경험을 덧붙였다.
“7~8년 전에 우리나라 동학(東學) 이론가의 최고 전문가라는 윤모 교수를 모시고 전국 동학 유적지를 답사한 일이 있습니다. 사전에 동학 관련 논문 200여 편을 독하게 읽고 윤모 교수를 만났었지요. 그때 3박 4일간 경상도 전라도 동학 유적지를 돌았는데, 동학 교조 수운 최제우 선생 태묘(太墓) 앞에서 여쭈었습니다. ‘수운 선생이나 2대 교주 해월 선생 캐릭터는 생전에 어땠을까요? 훈남이었을까요? 차도남이었을까요?’”
윤모 교수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참을 뜸을 들이다 “그야 조선시대 유학자와 가까웠겠죠”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 숙소에서 막걸리를 한잔 하면서 윤모 교수가 실토하듯 말했다. “이제껏 동학 연구로 숱한 사람을 만났지만 그런 질문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고.

우리나라의 경우 18세기 이전까지는 대체로 무교, 불교, 도교, 유교(유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아서, 18세기 천도교 전래를 기점으로 또 어떤 기준으로는 19세기 개항을 기점으로 해서는 서양 종교가 일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깨친 자’에 대한 논의는 그 역사가 오래됐습니다. 
하지만 깨친 자를 뜻하기도 하는 선각자(先覺者)는 문자 그대로 ‘남들보다 조금 더 뭘 좀 아는 자’일 뿐, 그가 전혀 다른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기껏 깨친 자, 선각자라고 할 것 같으면 ‘나이가 들어 알아간 사람이거나 경험치가 많아서 남들이 모르는 걸 알게 된 사람’ 정도일 것입니다. 
꼭 깨친 자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그 수준의 성과 속을 동시에 가지면서 상황상황에 맞게 어떨 때는 성을, 또 어떨 때는 속을 발현하는 미완의 동물일 뿐입니다.
사서삼경이 말하는 각자(覺自)나 여러 종교가 말하는 성자(聖自)는 모두 실재가 아니라 지향점일 뿐이라는 게 인간사를 두루 살펴본 제 결론입니다.
깨친 자, 선각자, 각자, 성자가 대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그저 자기 삶이나 속되지 않게 살도록 노력하고 부단히 실천하는 자만이 조금 더 낫다고 볼 수 있는 인간일 뿐입니다.  
그렇게 사는 인간도 영 성스럽게만 살아낼 수 없는 게 인간입니다. 그리고 좀 더 나은 인간으로 산다는 건 직분, 지위, 신분과 남녀와 노소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이 점이야말로 인간사에서 각별히 유념해야 할 사실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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