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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정의번 시총’ 경상북도 기념물 지정 - 끝

세계 유래없는 시총, 충효의 고장 영천의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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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1.10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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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기룡산 기슭 하절이라 불리는 영일정씨 문중 묘역에 자리한 정의번 묘소 ‘시총’이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정의번 시총은 임란 당시 경주성 탈환 전투에서 부친을 구출하고 전사한 정의번의 시신을 찾지 못하자 부친 정세아가 지인들에게서 수집한 만사로 조성한 유례가 드문 무덤이다. 이번 시총의 문화재 지정은 민과 관이 협심해 이루어낸 값진 결과물로 평가 받고 있다. 본보는 전란 속에서도 부자지간의 애틋한 정을 보여주는 ‘정의번 시총’을 향토 사학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3차례에 걸쳐 정리했다.[편집자주]

1778년 3월 선원리 대환마을에 환구세덕사를 건립하고 위패 봉안하게 되고, 1784년 2월 충효정려가 되니 간옹 이헌경(李獻慶, 1719 ~ 1791)과 번암 채제공(蔡濟恭, 1720 ~ 1799)이 기문을 지었으며, 그 해 9월 초6일에 충효각이 건립하게 되었다. 이때 이헌경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백암(柏巖)이 가지런하고 자호(紫湖)가 출렁인다. 빛나게 붙은 현판에 분(粉) 글자가 손과 같이 희도다. 아들의 충효가 있어서 그 아버지가 빛났고, 빛이 있어서 자손만대 전하니 생각하고 힘써서 계승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고, 더욱이 그의 자손 뿐 아니라 온 나라의 권장이며 백세의 법이로다.”또한 채제공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사람들이 만일 그 정열(貞烈)만 공경할 줄 알고 좋은 것을 보고서 그 좋은 것을 따라가는 의를 알지 못하면 충성에 대해서도 구차할 뿐이요, 효도에 대해서도 깨칠 뿐일 것이니 어찌 성상(聖上)의 교화(敎化)를 세워서 세상 교육을 권면하는 뜻이겠느냐. 이제 내가 여기에 개탄하는 바가 있노라. 바야흐로 공이 세 번이나 돌입(突入)할 적에 그 종 억수(億壽)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아버지는 적에게 돌아가시니 나는 마땅히 죽을 것이다. 너는 마땅히 가거라.”하니, 종 억수가 말하기를, “주인이 이미 죽기를 결단할지니 종이 어디로 가겠습니까?”하고서, 드디어 말을 잡고 달려 들어가 함께 죽으니 어찌 그다지도 기특하랴. 공의 마을은 이미 화려히 정려(旌閭)가 있은 즉 충노(忠奴)의 정려(旌閭)로서 그 곁에다 하는 것이 가(可)하다 하지 않겠는가? 아직 여기에 써 두고서 기다리노라.”
1870년 윤10월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추증되자, 1874년 윤10월 22일 시총에서 분황[900여 인 참석]을 거행하였으며, 2016년 11월 18일 환구세덕사를 환구서원으로 승원하여 고유하고, 정세아와 정의번의 향사를 받들게 되었다.
1931년 조선총독부 관방문서과에 근무하던 왜인(倭人) 촌산지순(村山智順)이 전국 방방곡곡 산하를 순방하여 지세, 지형, 묘터, 집터 등을 조사하여 조선 문화의 연구 자료로써 총 망라하여 『조선의 풍수』라는 책을 발간한 그 책에 시총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상북도 영천군 자양면 성곡동에 정의번(鄭宜蕃)의 시총비(詩塚碑)라고 하는 비가 있다. 이것은 임진란 때 전장에서 전사한 정의번의 유해를 장사할 수 없었으므로 그 분의 생전에 자작(自作)한 시(詩)를 묻어 총(塚)으로 하고, 부인 신(辛)씨를 부장하였다는 묘의 유래를 명기(銘記)한 것인데 시탁(詩托)하여 총(塚)으로 하였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시(詩)로써 무덤을 만드는 것은 예(禮)에는 없는 예(禮)이다. 옛 선비들이 혼을 불러서 장사 지내는 것을 논하며 말하기를 혼은 하늘에 돌아가고 육체는 땅에 돌아간다 하니 진실로 체백(體魄)이 없다면 사당에서만 제사지낼 뿐이다. 혼기(魂氣)는 장사지낼 수 없으니 그러면 화살로 복(復)을 부르고 옷으로는 혼을 부르는 것은 모두 무덤을 할 수 없으되 다만 시(詩)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상징한 것이다. 때문에 시는 체백에 당할 수 있으니 시로서 무덤을 하는 것이 또한 예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는 반드시 뼈로써 장사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시로써 장사하는 것을 불행으로 여기나 그러나 쓸쓸한 거친 언덕에 뼈를 장사하는 것이 한없이 많을 테지만 마침내는 썩어 없어지는데 돌아갈 뿐이고, 그 사람과 시는 끝내 오래되어도 썩어버리지 않을 것이니 이 무덤이 얼마나 위대하겠는가?”
이상 설명했다시피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시총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영일정씨 문중의 광영뿐만 아니라 충효의 고장 영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시총 근처에는 아버지 정세아의 정자인 강호정과 신도비 및 하천재를 비롯한 삼휴정, 사의당, 호회공 종택과 오회당이 남아 있고, 입후를 한 정호례가 입향한 선원마을에도 많은 유적지가 있으며, 영천시 대전동에는 정호례가 지은 호수종택과 후손들이 선원리 대환마을에 정의번과 정호례를 위해 지은 충이당도 남아 있다.

임고 선원리 환구세덕사 건립과 위패 봉안 및 충효각 건립
최 시장, “시총과 선현을 선양하는 사업 지속적으로 거행해야”

최기문 영천시장은, 
“지금부터 430년 전인 1592년 조성된 이 시총(詩塚)은 고금(古今)을 통해 있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있지도 않을 유적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렇듯 문중과 유림은 선현을 선양(宣揚)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거행하였으며, 나라에서는 거듭 은전을 내렸으니, 시총(詩塚)과 아울러 시총 앞에 자리한 충노(忠奴) 억수(億壽)의 묘소도 함께 묶어 문화재로 지정할 충분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고 말하고,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복성에 성공한 영천성수복전투에 참여한 각 문중의 훌륭한 분들의 업적을 함께 기림은 물론, 그분들이 남긴 뜻을 잘 이어 받아 영천을 빛내는 주춧돌로 삼을 것이라 천명하였다.
영천 시내에서 시총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임고면과 자양면에도 그와 연관된 유적이 많이 산재되어 있기에, 이러한 자원과 시총을 연계하여 충효 및 호국 교육의 장소로 적극 활용함은 물론, 특히 포은 정몽주 선생께서 남기신 충효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유적지가 될 수 있도록 잘 관리하고, 아울러 전통교육의 장소로 만들어 가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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