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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정의번 시총’ 경상북도 기념물 지정 - ②

“정의번 부인 신씨 양자 입후 위해 어가 앞에 상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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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1.04 14:16
  • 수정 2024.01.04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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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번 부인 신씨 양자 입후 위해 어가 앞에 상언하다”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기룡산 기슭 하절이라 불리는 영일정씨 문중 묘역에 자리한 정의번 묘소 ‘시총’이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정의번 시총은 임란 당시 경주성 탈환 전투에서 부친을 구출하고 전사한 정의번의 시신을 찾지 못하자 부친 정세아가 지인들에게서 수집한 만사로 조성한 유례가 드문 무덤이다. 이번 시총의 문화재 지정은 민과 관이 협심해 이루어낸 값진 결과물로 평가 받고 있다. 본보는 전란 속에서도 부자지간의 애틋한 정을 보여주는 ‘정의번 시총’을 향토 사학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3차례에 걸쳐 정리했다. [편집자주]

경주성전투서 함께 죽은 총노 억수의 시실 수습해 시총앞에 묻어
정의번의 아우 정수번의 차자 호례를 입후하며 가상히 여겨

 

 

시총을 만들 때 경주성전투에서 함께 죽은 충노(忠奴) 억수(億壽)의 시신을 수습하여 시총 앞에 아담한 묘소를 만들고 현재까지 잘 관리를 하고 있다.

시총을 조성할 당시 도의로써 허교(許交)한 지기가 대단히 많았으며 모두 글을 만들어 조상(弔喪)하였는데, 현재는 오직 오봉(梧峯) 신지제(申之悌, 1562 ~ 1624) 공의 ‘정위보(鄭衛甫)의 총문(塚文)’ 한 편이 홀로 세상에 전하며, 그 비명에 다음 글이 남아 있다.
“한 줌 흙의 시 무덤에 / 아름다운 그 이름 홀로 우뚝하니 / 혼이여, 어서 돌아오라 / 산에 파초가 있나니.”
시총이 조성된 후에 많은 명현달사들이 방문하여 애도하게 되는데, 이형상(李衡祥, 1653 ~1733)이 남긴 시 「정공(鄭公)의 난(難)」이 『병와문집(甁窩文集)』에 실려 있으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되 장부되기가 어렵고, 장부는 유식하기 어렵다. 유식하되 효(孝)하기가 어렵고, 효는 하더라도 죽는데 이르기까지는 더욱 어렵다. 죽음으로써 충성을 온전히 하기 어렵고 또 어려운 것이지만 모두가 부끄러움이 없이 하는 것은 어렵고도 또 어렵다. 남에게 부끄러움이 없이 하는 것은 하늘도 또한 어렵고, 하늘도 또한 어기기 어려운데, 자식이 없는 것이 어렵고, 자식을 못 두고 죽음에 또한 자식 두기 어려운데, 세상에 육지의 소리개와 같이 높이 나는 것은 어려운 중에 더 어려울 수가 없다. 어려운 것을 아는 자가 어려움을 행하는 것은 더욱 어렵고, 어려운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정공(鄭公)과 같이 되기가 어렵다.”
또한 임필대(任必大, 1709 ~ 1773)는 「시총부(詩塚賦)」를 지어 『강와문집(剛窩文集)』에 남기니, 그 글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드디어 묘전(墓前)에 나아가 흰 갈대를 깔고서 맑은 술로 잔을 드리고 맑은 바람을 쏘이며 끼치는 향기를 맡아가며 짧은 애사를 노래함에 오히려 다소나마 편하구나. 노래에 이르기를, “혼이여, 돌아오라. 무덤에 시가 있다. 혼이여, 돌아오라. 산에는 파초가 있다.”라고 하고 이어서 찬을 하여 말하기를, “산은 갈아 없앨 수 있으되 절개는 갈아 없앨수가 없고, 무덤은 무너질 수 있으나, 이름은 무너질 수 없도다.”하더라.”

정의번이 전사한 이후 학봉 김성일 선생의 장계로 1592년 11월 21일 통덕랑 호조정랑 증직되었기에, 1593년 정월 시총에서 분황을 거행하였으며, 아들이 없는 관계로 1633년 2월 정호례(鄭好禮)를 입후(立後)하게 된다.
이 당시에는 양자나 입후에 관해서는 조정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데, 승인을 받는 데는 정의번의 부인인 신씨(辛氏)가 어가(御駕) 앞에서 상언(上言)하게 되는데, 당시 기록인 1633년 2월의 예조입안(禮曹立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상도 영천(永川)에 거주하는 증호조정랑(贈戶曹正郎) 성균생원(成均生員) 정의번(鄭宜蕃)의 아내 신씨(辛氏)가 어가(御駕) 앞에서 상언(上言)하기를, 정의번(鄭宜蕃)이 임진왜란에 전망(戰亡)하였을 때 자식이 없었기에, 아우 절충장군(折衝將軍) 부호군(副護軍) 겸 내금위장(內禁衛將) 정수번(鄭守藩)의 차자(次子) 호례(好禮)를 세 살 이전부터 젖을 먹이고 키워왔는데 이미 장성하였으며, 본인의 나이는 이미 팔십이며 병이 들었으니 호례(好禮)를 입후(立後)하도록 청합니다.”
함에 승인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는데, 여기에서 보듯이 일찍 남편을 여읜 신씨 부인은 남편의 대를 잇기 위해 조카를 어릴 때부터 키워왔으며, 입후를 위해 어가에 엎드려 상언을 올려 기어코 그 뜻을 이루어냈으니 얼마나 가상한 일인가!
이후 1705년 자양현 일견봉 아래 충현사를 건립하였으나, 이내 폐하게 되고, 1732년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1755년 시총비[비명 : 오광운(吳光運, 1689 ~ 1745) 지음]를 수갈하였는데, 오광운은 비명에 다음과 같이 남겼다.
“나라가 망한다고 자기 몸을 망쳤으니 / 몸은 망하고도 나라를 살렸도다. 아! 충성스런 신하로다. / 아버지가 죽었다고 죽을 결심을 하고 / 자기 몸은 죽어서도 아버지를 살렸으니 / 아! 효성스런 아들이로다. / 임금과 어버이를 위해서 몸을 바치고도 / 자기는 아무 것도 둠이 없도다. / 몸을 버리는 것을 마치 문 닫듯이 하였고 / 임금과 어버이에 의해 내 무덤을 만드는데 / 시(詩)로써 장사하니 혼을 장사하는 것 같도다. / 산은 무너질 수 있고 바다는 마를 수도 있으나 / 우뚝한 이 무덤은 시(詩)인가? 제문(祭文)인가? / 공을 죽게 하지 않은 것은 절개이어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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