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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집 ] ‘정의번 시총’ 경상북도 기념물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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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2.2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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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한 정의번의 시신 못찾아 의관과 만사, 제문으로 무덤 조성한 의총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기룡산 기슭 하절이라 불리는 영일정씨 문중 묘역에 자리한 정의번 묘소 ‘시총’이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됐다.

정의번 시총은 임란 당시 경주성 탈환 전투에서 부친을 구출하고 전사한 정의번의 시신을 찾지 못하자 부친 정세아가 지인들에게서 수집한 만사로 조성한 유례가 드문 무덤이다. 이번 시총의 문화재 지정은 민과 관이 협심해 이루어낸 값진 결과물로 평가 받고 있다. 본보는 전란 속에서도 부자지간의 애틋한 정을 보여주는 ‘정의번 시총’을 향토 사학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3차례에 걸쳐 정리했다.[편집자주] 

 

 백암(栢巖) 정의번(鄭宜蕃, 1560 ~ 1592)의 묘소인 시총(詩塚)이 경상북도 문화재인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경상북도에서는 “정의번의 시총은 임진왜란 당시 경주성 탈환 전투에서 위기에 처한 아버지 정세아를 구하고 순국한 정의번의 시신을 찾지 못하자, 그의 아버지인 정세아가 의관과 함께 아들의 지인들에게서 수집한 만사와 제문으로 시신을 대신하여 조성한 세계적으로 희귀한 무덤이다. 정의번에 대한 추승 또한 여러 차례의 추증으로 표현되었으며, 조선사회가 지향하는 충효라는 가치, 고인을 추승하는 방법으로서 독특한 시총을 조성하였다는 희소성이 있으므로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한다고 하였다.

경북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산 78번지 기룡산(騎龍山) 기슭에는 하절(夏節)이라 불리는 영일정씨 문중 묘역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묘역은 정의번의 조부 정윤량에 의해 조성되었다.

정윤량은 그의 부친이 죽자 어느 곳에 묘를 쓰려고 땅을 파고서 돌과 나무뿌리를 가려내고 있었는데, 설학대사라는 스님이 마침 그 옆을 지나가다가 혀를 끌끌 차면서 ‘참으로 효자라더니 길지가 아닌 곳에 묘 터를 잡다니 어인 까닭인가’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정윤량이 뒤늦게 그 말을 듣고서 십리를 따라갔더니 설학대사가 “그대는 정성스런 효성이 있으니 마땅히 이 산의 주인이 되지 않겠는가?”라면서 그곳에 묘 터를 점지하여 주었다고 하니 후세 사람들이 왼손바닥을 펼친 모습[좌장혈(左掌穴)]의 명당이라 이르고 있으며, 이 묘역 가운데 정의번의 시총(詩塚)과 아버지 정세아(鄭世雅), 할아버지 정윤량(鄭允良), 증조부 정차근(鄭次謹)의 묘소를 비롯하여 후손들의 묘 80여기가 모셔져 있다. 

효자로 이름난 정윤량은 퇴계 선생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우고, 함께 퇴계 선생 문도인 노수, 김응생과 더불어 포은 정몽주 선생을 배향하는 임고서원을 창건하였다. 

이곳 하절 묘역에 시를 모아 무덤을 만든 시총(詩塚)이 있다. 이 시총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서 왜군과 싸우다 장렬히 순국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아버지에게 효를 다한 정의번의 무덤으로, 아들에 의해 목숨을 구한 아버지 정세아에 의해 조성되는데, 순국한 아들의 시신을 찾지 못하자 아들이 입던 의건(衣巾)을 가지고 경주 전진(戰陣) 터에서 초혼하여 빈소 지어 곡을 하고 또 당시 마음을 알고 지내던 지기들에게 애사(哀詞)를 구하여 관에 넣어가지고 선영 묘소 곁에다가 장사를 지내니 즉 기룡산(騎龍山) 병좌(丙坐)의 언덕이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이르되, “시총(詩塚)”이라 하였다. 그 후 45년 뒤인 1637년에 공인(恭人) 신씨(辛氏)를 여기에다 합장하여 장사를 지냈다.

정의번의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킨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 1535 ~ 1612)인데, 그의 나이 58세에 의병장이 되어 왜군에게 빼앗긴 영천성을 전국 최초로 되찾은 전과를 올렸으며, 영천성의 수복은 한양으로 가는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전세를 뒤집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정의번에 대해 살펴보면, 1560년 영천 자양 노항촌에서 출생하여, 1585년 사마시에 급제[생원]하였으며, 1592년 5월 임란 때 아버지를 따라 창의를 하여, 1592년 7월 28일 영천성 복성전투에 참전하여 전국 최초로 영천성을 복성하고, 1592년 8월 21일 경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에 아버지 정세아는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자 지기들의 만사와 제문으로 시신을 대신하여 시총을 조성하게 되었다.

경주성 전투를 살펴보면, 전국 최초로 영천성을 수복한 후에 경주성을 수복하기 위해 아버지 정세아가 연합군의 선봉장이 되어 성안으로 진격하였으나, 치열한 전투 중 관군이 달아나는 바람에 적들에게 포위당하게 되며, 이 와중에 말도 잃어버리게 되는데, 정의번은 자신의 말을 아버지에게 주고 포위망을 탈출하려 혼전을 벌이다가 그만 부자가 헤어지게 되는데, 아버지 정세아 공은 무사히 탈출하였으나, 아버지가 전사한 줄로만 안 정의번은 적의 창과 화살을 맞고서도 용맹하게 싸우다가 순국하였으니, 나라와 아버지를 위한 장렬한 죽음이었으며, 이때가 정의번의 나이 33세 때였다.(계속)

정리=전용창 기자 

 

시총을 만들 때 경주성전투에서 함께 죽은 충노(忠奴) 억수(億壽)의 시신을 수습하여 시총 앞에 아담한 묘소를 만들고 현재까지 잘 관리를 하고 있다.

시총을 조성할 당시 도의로써 허교(許交)한 지기가 대단히 많았으며 모두 글을 만들어 조상(弔喪)하였는데, 현재는 오직 오봉(梧峯) 신지제(申之悌, 1562 ~ 1624) 공의 ‘정위보(鄭衛甫)의 총문(塚文)’ 한 편이 홀로 세상에 전하며, 그 비명에 다음 글이 남아 있다.

 

“한 줌 흙의 시 무덤에 / 아름다운 그 이름 홀로 우뚝하니 / 혼이여, 어서 돌아오라 / 산에 파초가 있나니.” 

시총이 조성된 후에 많은 명현달사들이 방문하여 애도하게 되는데, 이형상(李衡祥, 1653 ~ 1733)이 남긴 시 「정공(鄭公)의 난(難)」이 『병와문집(甁窩文集)』에 실려 있으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되 장부되기가 어렵고, 장부는 유식하기 어렵다. 유식하되 효(孝)하기가 어렵고, 효는 하더라도 죽는데 이르기까지는 더욱 어렵다. 죽음으로써 충성을 온전히 하기 어렵고 또 어려운 것이지만 모두가 부끄러움이 없이 하는 것은 어렵고도 또 어렵다. 남에게 부끄러움이 없이 하는 것은 하늘도 또한 어렵고, 하늘도 또한 어기기 어려운데, 자식이 없는 것이 어렵고, 자식을 못 두고 죽음에 또한 자식 두기 어려운데, 세상에 육지의 소리개와 같이 높이 나는 것은 어려운 중에 더 어려울 수가 없다. 어려운 것을 아는 자가 어려움을 행하는 것은 더욱 어렵고, 어려운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정공(鄭公)과 같이 되기가 어렵다.”

또한 임필대(任必大, 1709 ~ 1773)는 「시총부(詩塚賦)」를 지어 『강와문집(剛窩文集)』에 남기니, 그 글의 말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드디어 묘전(墓前)에 나아가 흰 갈대를 깔고서 맑은 술로 잔을 드리고 맑은 바람을 쏘이며 끼치는 향기를 맡아가며 짧은 애사를 노래함에 오히려 다소나마 편하구나. 노래에 이르기를, “혼이여, 돌아오라. 무덤에 시가 있다. 혼이여, 돌아오라. 산에는 파초가 있다.”라고 하고 이어서 찬을 하여 말하기를, “산은 갈아 없앨 수 있으되 절개는 갈아 없앨 수가 없고, 무덤은 무너질 수 있으나, 이름은 무너질 수 없도다.”하더라.”

정의번이 전사한 이후 학봉 김성일 선생의 장계로 1592년 11월 21일 통덕랑 호조정랑 증직되었기에, 1593년 정월 시총에서 분황을 거행하였으며, 아들이 없는 관계로 1633년 2월 정호례(鄭好禮)를 입후(立後)하게 된다.

이 당시에는 양자나 입후에 관해서는 조정의 승인이 있어야 하는데, 승인을 받는 데는 정의번의 부인인 신씨(辛氏)가 어가(御駕) 앞에서 상언(上言)하게 되는데, 당시 기록인 1633년 2월의 예조입안(禮曹立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상도 영천(永川)에 거주하는 증호조정랑(贈戶曹正郎) 성균생원(成均生員) 정의번(鄭宜蕃)의 아내 신씨(辛氏)가 어가(御駕) 앞에서 상언(上言)하기를, 정의번(鄭宜蕃)이 임진왜란에 전망(戰亡)하였을 때 자식이 없었기에, 아우 절충장군(折衝將軍) 부호군(副護軍) 겸 내금위장(內禁衛將) 정수번(鄭守藩)의 차자(次子) 호례(好禮)를 세 살 이전부터 젖을 먹이고 키워왔는데 이미 장성하였으며, 본인의 나이는 이미 팔십이며 병이 들었으니 호례(好禮)를 입후(立後)하도록 청합니다.”

함에 승인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는데, 여기에서 보듯이 일찍 남편을 여읜 신씨 부인은 남편의 대를 잇기 위해 조카를 어릴 때부터 키워왔으며, 입후를 위해 어가에 엎드려 상언을 올려 기어코 그 뜻을 이루어냈으니 얼마나 가상한 일인가! 

이후 1705년 자양현 일견봉 아래 충현사를 건립하였으나, 이내 폐하게 되고, 1732년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 1755년 시총비[비명 : 오광운(吳光運, 1689 ~ 1745) 지음]를 수갈하였는데, 오광운은 비명에 다음과 같이 남겼다.

“나라가 망한다고 자기 몸을 망쳤으니 / 몸은 망하고도 나라를 살렸도다. 아! 충성스런 신하로다. / 아버지가 죽었다고 죽을 결심을 하고 / 자기 몸은 죽어서도 아버지를 살렸으니 / 아! 효성스런 아들이로다. / 임금과 어버이를 위해서 몸을 바치고도 / 자기는 아무 것도 둠이 없도다. / 몸을 버리는 것을 마치 문 닫듯이 하였고 / 임금과 어버이에 의해 내 무덤을 만드는데 / 시(詩)로써 장사하니 혼을 장사하는 것 같도다. / 산은 무너질 수 있고 바다는 마를 수도 있으나 / 우뚝한 이 무덤은 시(詩)인가? 제문(祭文)인가? / 공을 죽게 하지 않은 것은 절개이어라.”

1778년 3월 선원리 대환마을에 환구세덕사를 건립하고 위패 봉안하게 되고, 1784년 2월 충효정려가 되니 간옹 이헌경(李獻慶, 1719 ~ 1791)과 번암 채제공(蔡濟恭, 1720 ~ 1799)이 기문을 지었으며, 그 해 9월 초6일에 충효각이 건립하게 되었다. 이때 이헌경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백암(柏巖)이 가지런하고 자호(紫湖)가 출렁인다. 빛나게 붙은 현판에 분(粉) 글자가 손과 같이 희도다. 아들의 충효가 있어서 그 아버지가 빛났고, 빛이 있어서 자손만대 전하니 생각하고 힘써서 계승하지 아니치 못할 것이고, 더욱이 그의 자손 뿐 아니라 온 나라의 권장이며 백세의 법이로다.”

또한 채제공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사람들이 만일 그 정열(貞烈)만 공경할 줄 알고 좋은 것을 보고서 그 좋은 것을 따라가는 의를 알지 못하면 충성에 대해서도 구차할 뿐이요, 효도에 대해서도 깨칠 뿐일 것이니 어찌 성상(聖上)의 교화(敎化)를 세워서 세상 교육을 권면하는 뜻이겠느냐. 이제 내가 여기에 개탄하는 바가 있노라. 바야흐로 공이 세 번이나 돌입(突入)할 적에 그 종 억수(億壽)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아버지는 적에게 돌아가시니 나는 마땅히 죽을 것이다. 너는 마땅히 가거라.”하니, 종 억수가 말하기를, “주인이 이미 죽기를 결단할지니 종이 어디로 가겠습니까?”하고서, 드디어 말을 잡고 달려 들어가 함께 죽으니 어찌 그다지도 기특하랴. 공의 마을은 이미 화려히 정려(旌閭)가 있은 즉 충노(忠奴)의 정려(旌閭)로서 그 곁에다 하는 것이 가(可)하다 하지 않겠는가? 아직 여기에 써 두고서 기다리노라.”

1870년 윤10월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추증되자, 1874년 윤10월 22일 시총에서 분황[900여 인 참석]을 거행하였으며, 2016년 11월 18일 환구세덕사를 환구서원으로 승원하여 고유하고, 정세아와 정의번의 향사를 받들게 되었다.

1931년 조선총독부 관방문서과에 근무하던 왜인(倭人) 촌산지순(村山智順)이 전국 방방곡곡 산하를 순방하여 지세, 지형, 묘터, 집터 등을 조사하여 조선 문화의 연구 자료로써 총 망라하여 『조선의 풍수』라는 책을 발간한 그 책에 시총이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상북도 영천군 자양면 성곡동에 정의번(鄭宜蕃)의 시총비(詩塚碑)라고 하는 비가 있다. 이것은 임진란 때 전장에서 전사한 정의번의 유해를 장사할 수 없었으므로 그 분의 생전에 자작(自作)한 시(詩)를 묻어 총(塚)으로 하고, 부인 신(辛)씨를 부장하였다는 묘의 유래를 명기(銘記)한 것인데 시탁(詩托)하여 총(塚)으로 하였다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시(詩)로써 무덤을 만드는 것은 예(禮)에는 없는 예(禮)이다. 옛 선비들이 혼을 불러서 장사 지내는 것을 논하며 말하기를 혼은 하늘에 돌아가고 육체는 땅에 돌아간다 하니 진실로 체백(體魄)이 없다면 사당에서만 제사지낼 뿐이다. 혼기(魂氣)는 장사지낼 수 없으니 그러면 화살로 복(復)을 부르고 옷으로는 혼을 부르는 것은 모두 무덤을 할 수 없으되 다만 시(詩)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상징한 것이다. 때문에 시는 체백에 당할 수 있으니 시로서 무덤을 하는 것이 또한 예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는 반드시 뼈로써 장사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시로써 장사하는 것을 불행으로 여기나 그러나 쓸쓸한 거친 언덕에 뼈를 장사하는 것이 한없이 많을 테지만 마침내는 썩어 없어지는데 돌아갈 뿐이고, 그 사람과 시는 끝내 오래되어도 썩어버리지 않을 것이니 이 무덤이 얼마나 위대하겠는가?”

이상 설명했다시피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시총이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영일정씨 문중의 광영뿐만 아니라 충효의 고장 영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시총 근처에는 아버지 정세아의 정자인 강호정과 신도비 및 하천재를 비롯한 삼휴정, 사의당, 호회공 종택과 오회당이 남아 있고, 입후를 한 정호례가 입향한 선원마을에도 많은 유적지가 있으며, 영천시 대전동에는 정호례가 지은 호수종택과 후손들이 선원리 대환마을에 정의번과 정호례를 위해 지은 충이당도 남아 있다.

최기문 영천시장은, 

“지금부터 430년 전인 1592년 조성된 이 시총(詩塚)은 고금(古今)을 통해 있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있지도 않을 유적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이렇듯 문중과 유림은 선현을 선양(宣揚)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거행하였으며, 나라에서는 거듭 은전을 내렸으니, 시총(詩塚)과 아울러 시총 앞에 자리한 충노(忠奴) 억수(億壽)의 묘소도 함께 묶어 문화재로 지정할 충분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고 말하고,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복성에 성공한 영천성수복전투에 참여한 각 문중의 훌륭한 분들의 업적을 함께 기림은 물론, 그분들이 남긴 뜻을 잘 이어 받아 영천을 빛내는 주춧돌로 삼을 것이라 천명하였다.

영천 시내에서 시총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임고면과 자양면에도 그와 연관된 유적이 많이 산재되어 있기에, 이러한 자원과 시총을 연계하여 충효 및 호국 교육의 장소로 적극 활용함은 물론, 특히 포은 정몽주 선생께서 남기신 충효정신을 이어갈 수 있는 유적지가 될 수 있도록 잘 관리하고, 아울러 전통교육의 장소로 만들어 가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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