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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고 ] 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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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2.13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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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충래

전원생활체험학교장

본보 논설주간 

박광

본관은 밀양이다. 용감하고 호방하며 의협한 기상을 가져 산남의진에 종사한 날로부터 적을 상대하는 작전에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위축된 적이 없어 동엄공이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김성극 등과 함께 동엄공을 업고 적의 포위를 탈출하였고, 동엄공이 해를 입자 분통을 참지 못해 눈물을 지으며 “만약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차라리 한 놈의 적을 죽이고 내가 죽어도 괜찮다”라 하고 이세기 등과 더불어 온 힘을 다하여 많은 왜적을 죽였다. 

서기 1908년 무신 1월 일광천(日光川)에서 적을 마주하여 크게 싸웠다. 꽤 오랜 시간 전투가 지속되었는데, 광이 적의 탄환에 맞고 쓰러지자 이세기가 박광을 등에 업고 도망하였지만 거의 적에게 잡힐 지경이었다. 이때 박광은 억지로 이세기의 등에서 땅으로 내려와 “자네가 만일 나를 구하려 한다면 형편상 우리 둘 다 살아가지 못할 것이니 그것이 우리의 일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하며 차고 있던 칼과 총을 풀어 이세기에게 주면서 뒷일을 부탁하고 곧바로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죽었다.

 

<원문〉

朴匡은 密陽人이라 有勇敢豪俠之氣하야 自從事之日노 對敵作戰하야 未嘗畏縮한이 東广公이 甚奇之러라 與金聖極等으로 負東广公脫圍하다 及東广公被害에 悲憤涕之曰讐若不報則寧殺一敵而死라도 可也하고 與李世紀等으로 戮力하야 多殺倭하다 甲戌正月에 對敵於日光川하야 大戰良久에 爲敵丸所中하야 世紀負而去之한이 幾爲敵兵所逼이라 强吏下地曰子若捄我면 勢不得免이라 有何益哉리오 解其佩刀與銃하야 與李世紀而託後事하고 卽剄其頸而死하다 

<山南倡義誌 卷下 35p>

 

朴匡 義士 略歷(박광 의사 약력)

朴匡(박광)은 一名(일명)은 柱匡(주광)이라 貫鄕(관향)은 密陽(밀양)이오 其先(기선)은 新羅(신라) 王室(왕실) 後裔(후예)로서 高麗(고려) 太宗朝(태종조)에 太師(태사) 中書令(중서령) 門下侍中(문하시중) 密城府院君(밀성부원군) 彦孚(언부)의 三十一世孫(삼십일세손)이라 그의 家世(가세)는 近代(근대)에 와서 永川郡(영천군) 北(북) 檢丹(검단) 畓谷(답곡) 等地(등지)에 居住(거주)하여 公(공)은 畓谷(답곡) 出身(출신)이라 性稟(성품)이 淳厚(순후)하고 臂力(비력)이 健壯(건장)하였다. 山南義陣(산남의진) 일어날 때에 그 陣(진)의 參謀長(참모장) 孫永珏 公(손영각 공)과 한 동리에 公(공)은 거주하였기 때문에 孫公(손공)의 지휘를 받고 남 먼저 入陣(입진)하여 求人(구인) 謀事(모사)에 風雨(풍우)를 피치 않고 많은 努力(노력)을 하였고 그 후 出征(출정)하여 攻城野戰(공성야전)으로 활약할 때에도 위험을 피치 않고 항상 선두에서 싸웠다. 丁未年(정미년) 가을에 東广先生(동엄선생)이 陣事(진사)를 總統(총통)하고 部署(부서)를 다시 編成(편성)할 때 公(공)은 後鋒將(후봉장)이란 任務(임무)를 받고 또는 접전이 있을 때는 公(공)은 三四名(삼사명)의 壯士(장사)를 더불고 將營(장영)을 보호하였다. 그해 겨울에 東广先生(동엄선생)이 殉節(순절)하고 部下(부하)들은 서로 단취되어 항전을 계속하기로 되는데 戊申 正月 初三日(무신 정월 초삼일)에 義兵(의병)이 왜적을 더불고 日光川(일광천)에서 접전되어 公(공)은 重傷(중상)을 입고 넘어졌다. 同志(동지) 李世紀(이세기) 公(공)을 업고 달아날 작정을 한다. 公(공)은 자기의 총과 칼을 世紀(세기)에게 넘겨주고 업히는 것을 거절하고 말하기를 나는 이미 죽는 몸이라 죽는 사람 때문에 살 사람이 더 죽을 필요 없다 하고 자기 손으로서 자기 목을 찔러 자살하다. 왜놈들은 그 자리를 찾아와서 公(공)의 머리를 베어갔다. 迎日郡 日月鄕誌(영일군 일월향지)에 기록된 逸話(일화)를 보면 公(공)이 入陣(입진)하고 그의 家庭(가정)에서 父母兩親(부모양친)이 차례로 別世(별세)하였다. 公(공)은 그때에 陣中(진중)에서 訃告(부고)를 받고 北望痛哭(북망통곡)하고 赴喪(부상)을 못하였으며, 또는 그 洞里(동리) 앞을 일곱 번이나 지나가면서도 한 번도 자기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눈물을 흘린다. 그의 夫人(부인)은 路邊(노변)에서 바라보고 痛哭(통곡)한다. 公(공)은 夫人(부인)에게 謝過(사과)하기를 나는 父母(부모)에게 子息(자식)된 도리를 못하였고 妻子(처자)에게 家長(가장)된 이력을 못하였으니 나는 家庭(가정)에 큰 罪人(죄인)이다. 이 나라를 찾아서 내 죄를 속양코저 하니 그때를 기다려 주기를 바란다 하였다더라. 養子(양자) 수봉이 養父(양부)의 무덤을 招魂葬(초혼장)으로 하고저 경영한다. <山南義陣遺史447~448p> 1991년 애국장 추서. 생몰연대: 미상~1908

 

공훈전자사료관 공적조서

1906.3月 慶北 永川에서 鄭鏞基가 起義하여 山南倡義陣을 編成할 때 參與하여 軍威 義興 등地에서 募兵活動을 하고 鄭鏞基가 殉國하자 李世紀 등 同志와 함께 活動을 繼續하다가 1908.1月 廣川에서 日軍과 交戰中 負傷당하자 自決 殉國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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