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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 마음의 밭을 가는 농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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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2.13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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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감 해공

대한불교 조계종 보현산 호국 충효사 회주

사회복지법인 충효자비원 이사장

 

 

이번에 출판하게 된 법문집은 지난 1년간 법상에서 설법한 내용 중에 몇 가지를 간추린 것입니다. 열심히 법문을 듣고, 기도를 하는 불자들을 만날 때마다 뜨거운 구도의 열정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함께 밭을 가는 농부 같은 마음으로 설법의 내용을 분류하여 편집해 보았습니다. 구도의 길에서 행복의 밭을 가는 모든 분들께 감로의 법비가 내려지고 불은(佛恩)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하오며, 법문을 엽니다.

보현사 도량에서 석해공 합장 

 

 (지난호에 이어)

 

돈과 명예를 가진 사람이 협조를 구하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발 벗고 나섭니다. 거기에는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깔려있습니다. 보답을 바라고 베푸는 것이 자비심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품앗이일 뿐입니다. 만약 그런 사람을 도와주었는데 나중에 몰라라하면 대부분 섭섭해 합니다. ‘내가 힘들 때 도와주었는데 나 힘들 때 도와주지 않으니 사람의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섭섭해 하고 헐뜯게 됩니다. 어려운 사람이나 지체 있는 사람의 일을 잠시 도왔다고 해서 자비의 공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돕는 마음이 진정으로 어떠한 마음이었는가가 중요합니다.

큰 부자와 아주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두 사람에게 구걸하는 사람이 왔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모두 괴로워합니다. 큰 부자는 자신의 것을 조금이라도 주는 것이 아까워 괴롭고, 가난한 사람은 줄 것이 너무 없어 괴로워합니다. 큰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니 둘 다 구걸하는 사람에게 조금 주기는 했지만 그 공덕에는 큰 차이가 납니다. 한 사람은 아귀가 되어 훗날 고통을 받을 것이지만, 다른 한 사람은 천상의 복락을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이 베풀고, 조금 베풀고 하는 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심으로 얼마나 거룩한 자비심으로 베풀었는가에 차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증일아함경」성문품에 보면 “보시의 좋은 마음과 인색한 마음이 서로 싸우고 있으니 이러한 보시는 성자가 꺼리는 것이니라. 보시할 때는 두 마음이 싸워야할 때가 아니니라. 공덕을 지으려면 싸우는 마음이 없어야 하나니 좋은 뜻을 따라 베풂을 행하라” 하였습니다.

베풀면서 베풂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 곧 싸움입니다. 베풀까 말까, 줄까말까, 얼마나 줄까 이만큼? 요만큼?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미 공덕은 사라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래서 베풀고 싶은 마음은 청정한 마음 그대로, 우러나오는 그대로 나타나야 합니다.

자신이 기르던 가축은 아니지만 병으로 인해 생목숨이 끊어져야 하는 짐승들을 보면서 그들의 영혼을 천도하는 노보살님의 마음이 진정한 자비요, 그런 자비가 바로 공덕입니다. 그 보살님은 기도로 자신의 그 어떤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번 기회에 가축을 위한 기도를 해서 공덕을 쌓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고 기도를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제역으로 죽어가는 가축들이 불쌍하다보니 저절로 눈물이 나왔던 것이고, 저절로 그 가축들을 위한 기도가 나왔던 것입니다. 노보살님이 구제역에 뛰어들어 소들을 직접 구한 것은 아니더라도 소들을 위해 기도하는 그 진정한 마음이 곧 자비의 공덕이 되는 것입니다. 뉴스에서 구제역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 아파하는 국민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을 베푸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베푸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이 노보살님의 눈물어린 기도를 보면서 ‘보살심’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 자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쌍한 짐승 자라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전 재산을 내놓았습니다. 전 재산을 다 바쳐 방생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인간 자라가 자라를 살려주면서 더큰 복을 달라고 기원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불쌍해서 마음을 다해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공덕이 훗날 어려움을 극복하고 큰 재물을 얻는 복으로 돌아왔습니다. 처음부터 인간 자라가 짐승 자라에게 ‘내가 너를 살려주었으니 이 은혜를 꼭 갚아야 한다’고 했다면 훗날 큰 복을 얻을 수 있었을 까요?

「증일아함경」에 보면 “자기의 눈이나 재물등 귀중한 것을 주더라도 애착하는 마음을 내지 말아야 하느니라. 보살이 보시할 때에는 자기만의 깨달음을 위해서 하지 말고, 모든 중생들의 공덕을 위해서 해야 하느니라”하였습니다.

인간 자라의 자비심이 위대했던 것은 모든 것을 주고도 애착함이 없었던 것이요. 자기를 위한 베풂이 아니라 모든 중생들을 위한 공덕이었기 때문입니다.

청정한 마음 그대로 자비심 그대로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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