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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산남의진열전(山南義陣列傳)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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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1.01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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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충래

전원생활체험학교장

본보 논설주간 

손영각 의사는 창의부대의 참모장이었으나 입암전투에서 전사하여 그 활약 기간이 짧은 탓에 창의지에서는 비교적 짧게 소개된 듯하다. 마침 유사에서는 입암전투 상황을 그의 약력에서 상세하게 기록하여 그 상황을 대강이나마 짐작하게 해 준다.

 

손영각(孫永珏) 의사 약력 ②

본부는 장영 수위병 백여 인을 인솔하고 죽장 등지에 유진하여 각 부대들의 귀환을 기다리면서 매현리에서 유진하다. 그 이튿날 아침에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서 장기(將旗) 두 대가 일시에 전복되니 여러 사람이 모두 경급되어 소동스러운지라. 주장 단오 공이 옛날 손무의 일을 인증하여 여러 사람의 의혹을 해석시키다. 그날 정오에 군문집사 이두규와 우포장 김일언이 사소한 일로써 다투는지라 태형으로써 치죄하다. 그날 분위기는 종일토록 좋지 못하더니 저녁 식사를 하는 중에 후리가 보고하기를 적병이 청송으로부터 입암에 도착되었다 하는지라 이 정보를 받고 작전계획을 준비할 새, 김일언을 시켜 일지군을 인솔하고 명암에 복병케 하고, 이세기를 시켜 일지군을 인솔하고 광천에 복병하도록 하고 보낼 때에 분부하되 “적이 반드시 입암에 잘 것이다. 내일 새벽에 내가 입암을 습격할 터이니 너희들은 적들의 달아날 길을 막아서 기밀을 잃지 말라.” 하고 모두 복병할 장소로 보내다. 조금 되어 포성이 크게 일어나는지라 정녕코 기밀을 누설한 것이라 하고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어 급히 출발하려고 할 때, 후리가 와서 보고하되 이세기가 적을 습격하여 전적 승리하였다 하는지라. 반신반의하고 입암을 향하여 전진하니 산은 캄캄하고 구름은 자욱한데 밤은 깊고 길은 험하여 지척을 분별할 수 없이 입암 원촌에 이르니 적의 탄환이 빗발같이 쏟아지는지라. 한참동안 격전하다가 공이 대장 정용기와 중군장 이한구와 좌영장 권규섭 등과 함께 순절하니 때는 융희원년 9월1일 밤이었다.

후에 그날 밤 패전의 원인을 들어보면 이세기는 본래 성격이 과감하고 성공을 욕심내는 사람이라. 군령을 받고 밤에 입암 뒤산으로 지나가다가 불빛을 발견하고 적병을 정탐하니 적병이 한곳에 모여 저녁식사를 하는지라. 좋은 기회라고 자랑하며 새벽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고 적을 포위하고 사격하여 그곳에서 전승을 보고 본부에 전승 보고를 보내었으나, 다른 곳에 있던 적병이 우리를 포위하는 것은 미처 알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야 새로 포위된 것을 알고 돌격을 하여 간신히 벗어났으나 본부와 연락이 둔절되었다. 적병들은 이미 사방에 복병이 완료되고 전투태세가 확립되어 있었다. 이때 우리 본부는 전과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인근 지대에 사건이 일어났으니 응원을 않을 수 없어 이런 참패를 당한 것이다 하였으니 그 원인을 어찌 사람이 잘못하였다고만 지적하리요. 그날 밤의 패전 원인을 분석하여 보면, 암흑 칠야에 백색 의복이 유난히 잘 드러나서 적에게 정찰이 잘 되도록 되었으니 이것은 천시가 우리에게 불리하게 된 것이요. 산은 높고 골은 깊은데 다만 좁다란 길 한 갈래 뿐이라 좌우 석벽은 벌써 적이 점령하여 있었으니 이것은 우리에게 지리도 불리하게 된 것이라. 천시와 지리가 모두 불리하게 되었으니 큰 운수를 어찌할 수 없을 뿐일러라.

공의 시체는 공의 여서(女壻) 구회수가 (현)영일군 죽장면 가사리에 안장하였더니 그 후 60년을 경과하여 공의 증손 준(晙)이 주선하여 (현)월성군 강동면 초감리에 이장하다. 공의 계씨(季氏) 영준 공도 공이 순절한 익일에 순절하였다. 

<山南義陣遺史347p~350p>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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