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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고깔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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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0.18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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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관 식

작가 

에어포켓(2)

갑자기 밖이 소란했다. 뒤척이다가 겨우 잠든 낮잠이어선지 신경질적으로 눈을 떴다. 여자의 비명과 거듭되는 손찌검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방향은 옆집 같았다. 아무리 아웃사이더로 살아가고 있지만 내게도 정의감은 살아있다고 믿었다. 철썩, 살갗에 닿는 매질소리가 날 때마다 여자의 비명은 울부짖고 있었다. 슬리퍼 한쪽을 신는 둥 마는 둥 옆집 현관문 앞에 섰다. 낮잠을 방해해서 깼을 때는 바위기둥도 쓰러뜨릴 기세였는데 막상 문 앞에서는 오금이 저려왔다. 

식은땀이 흐르면서 숨이 막혀왔다. 돌아설까 망설이고 있는 내가 한없이 초라하고 비참하게 느껴졌다. 순간, 마주한 현관문이 심한 충격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였다. 여자가 살기위해 거세게 현관문 앞에서 저항하는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손잡이를 잡고 힘껏 문을 열었는지 가까스로 발만 겨우 나올 수 있는 문틈이 벌어졌다. 

 

 집안에 있는 여자의 눈과 머리채를 잡은 남자와 동시에 마주쳤다. 어색하고 민망하게 내가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저씨, 도와주세요!”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여자가 애원하고 있었다. 현관문이 벌컥 열리면서 남자가 튀어나왔다. 

“뭐야? 괜히 끼어들지 말고 가는 게 좋을 껄.”

싸우더라도 이웃집 낮잠을 깨우지 않는 선에서 조용조용 싸워 주십사,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입안에서 우물거리다가 삼켜버리고 말았다. 비폭력을 강조하며 살아온 나는, 이미 곤두설 털이 양순하게 화석화된 모양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돌아설 타이밍을 찾고 있었다. 남자는 다행히 윽박지르며 몰아세우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떨고 있지만 백 팔십에 백 킬로 덩치를 상대한다는 것은 버겁다고 생각한 탓일까 남자가 스스로 물러서주었다. 

그 틈을 노려 여자가 큰길 쪽으로 몸을 피했고 어찌되었든 일단락되는데 도움을 준 것 같아 뿌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다시 중단된 낮잠을 이어가기 위해 침대에 누웠지만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TV를 켰다. ‘아시안게임 여자 배드민턴 단체전서 중국을 꺾고 금메달, 한국 여자 배드민턴이 2023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중국을 넘고 29년 만에 아시아 정상에 우뚝 섰습니다.’ 활짝 웃고 있는 여자국가 대표선수들을 보며 아나운서의 열띤 멘트에도 나는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TV를 껐다.

은둔형 외톨이에 잠재적 범재자이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먹이사냥을 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나를 바깥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부모님의 교통사고 사망보험금도 반을 써버렸다. 바깥세상은 정글도를 휘두르며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데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내일부터 출근한다고 표현봉조각가에게 덜컥 약속한 내가 어떻게 보면 대견했다. 방세도 밀리지 않고, 가진 보험금이 바닥을 보였을 때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꼼지락거리는 생명에 미련 둘 것 없이 굳이 작별인사를 해야 될 인연을 만들기 전에 정말 사라지고 싶었다. 

일단 제 시간에 출근하고 제 시간에 퇴근하는, 정형화된 직장이 아니라서 좋았다. 비록 보조일이기는 하나 창의성과 상상력이 반영될지 모를 예술적인 기대치로 들뜨게 해서 좋았다. 무엇보다 문밖으로 벗어나 햇살 좋은날 햇살바라기로 세상 사람들 속에 어우렁더우렁 섞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좋았다. 컵라면으로 뱃속을 채웠다. 옆집은 더 이상 시끄럽지 않았다. 여자가 들어오지 않았거나 들어오지 않은 여자를 찾으러 갔거나 아무튼 이 적막이 썩 마음에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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