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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보통의 보통글밥 ] 다판(茶板) 제작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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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9.2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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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지 훈

(경북 김천, 1979.7.8~) 

지난해 화하고 환한 꽃들이 지고 봄이 돌아가는 길을 재촉하던 신새벽이었다. 목을 축이려고 주방에 갔다가 애지중지하던 둥근 다판이 밤새 깨져있는 걸 발견했다. 그 상실감에 헛헛함에 맹물을 찔끔찔끔 들이키다 희붐한 새벽 창밖의 메타세쿼이아와 마주했다. 높다란 이 나무는 막 새잎을 무섭게 틔워 생의 약동을 뽐내는 중이었다. 보들보들한 아기 손 같은 새잎을 보자 잎사귀 하릴없이 떨어지는 을씨년스런 가을의 신새벽이었다면 마음이 덜 아렸을까 싶었다. 둥근 다판에서 떨어져나간 도자기의 크기가 딱 작은 이파리만했기 때문이다. 

이 사달을 낸 범인을 색출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3년 전 코로나 절정기였던 한여름, 마스크를 낀 채 둘째를 자연 출산한 뒤, 육아휴직을 내고 한창 핏덩어리와 사투를 벌이는 아내에게 따져 물을 일은 못되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금쪽같은 내 새끼 돌본 값이라면 더 따져 무엇할 것인가. 그렇게 ‘다판 사망 사건’은 유야무야 묻혔다.

이 둥근 다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중국 태생으로 지름 28cm에 높이가 4cm이다. 물받이 하부는 도자기로 흰 바탕에 푸른 목단들이 열매처럼 주렁주렁 동그랗게 장식돼 있다. 우리는 작약이라고도 부르는 이 목단은 중국에서 꽃 중의 꽃 화왕(花王)으로 불리며, 부귀 여성 여왕을 상징한다. 우리에게 목단은 선덕여왕이 당태종에게 받은 모란꽃 그림 이야기로 친숙하다. 

상부 덮개는 대나무 원판으로 한가운데 가로 6.5cm 세로 6.5cm짜리 정사각형 퇴수구가 그 자체로 하나의 멋진 문양으로 작품처럼 투각돼 있다. 우리에게 대나무는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잘 알려져 있다. 대나무꽃은 대나무가 죽기 전에 평생 한 번 피기 때문에 본 사람이 진기할 정도여서 대나무꽃이 피었다 하면 뉴스가 되기 일쑤다. 대나무는 몸통이 텅 비어 있어 세찬 비바람에도 폭설에도 건재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같은 굳건함에서 지조와 절개의 이미지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이 둥근 다판은 값으로 치면 비싼 게 아니다. 다판은 대개 3종류가 있다. 첫째는 네모난 대나무 혹은 박달나무 다판이고, 둘째는 내가 애장하던 둥근 다판처럼 도자기와 대나무로 이뤄진 것이고, 셋째는 순수 돌을 깎아 만든 것이다. 다도 혹은 다례 입문자는 주로 네모난 대나무 다판을 쓴다. 물받이가 플라스틱으로 돼 있어 가장 실용적이고 저렴하기 때문이다. 가장 고가의 다판은 단연 천연 돌을 깎아 만든 돌 다판이다. 

내가 소장한 다판만도 5개인데 그중에서도 내가 둥근 다판을 유독 애호한 까닭은 내 일상다반사에 가장 유용하기 때문이었다. 차를 처음 시작할 때는 대중 기호에 맞춰 다판을 사 쓰지만, 10년 넘게 차 마시는 것이 일의 다반사가 되고 다구(茶具)가 제 몸처럼 느껴지면 다판도 실리를 따져 그중 편리한 걸 찾게 돼 있다. 내게는 둥근 다판이 내 몸처럼 여겨졌는데 그걸 잃었으니, 멀쩡한 대나무 상판만 어루만지며 한숨만 내쉬다 그길로 한동안 차 마시는 일을 그만두었다. 대나무 상판은 깨끗하게 닦아 서랍에 고이 모셔두었다. 

올봄 차(茶) 대선배 추사와 다산의 유배지 일상을 훑다가 문득 둥근 다판의 대나무 상판을 다시 살려 쓰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서랍 속에서 대나무 상판을 꺼냈다. 맨질맨질한 촉감이나 가운데 투각된 문양이나 다시 봐도 기분이 좋았다. 대나무 상판의 투각 문양은 내 결심을 알은 양 웃는 듯 보였다. 물받이만 해결하면 될 성싶었다. 대나무 상판 지름을 이때 처음 쟀다. 28cm. ‘지름 28cm짜리 대나무 상판이 고정될 물받이 될 만한 게 무엇이 있을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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