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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나누미칼럼 ] 영양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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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9.20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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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진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 원장 

(원문)

永陽誌序. 永陽古有志蓋筆記耳非榟壽也豈惇史者非夫人所可執信而斷例故先民寓難愼之義者歟辰檀之世漠矣紀羅以來有吾州矣書車接畿花木向陽宜其物産帳籍吏治人材之倍蓰於後世而存者無幾焉是由無誌以傳之也可勝慨哉今世局變而人趨異歧說舊境如南劍錯路視古事若羅刹譯語此吾生世未百年間所換拶者若更進乎此而漸加沈息則後之視今豈但吾之所慨古而已哉傷時憂昔抱殘景而噓唏也適幸鄕議以修誌鋟廣因舊誌而增恢之又以新寧方合壤故同編焉記事實處寧煩於詳而不褊簡敍人物處寧泛於博而不疏略蓋蹟之美者雖小而可夸事之善者雖衆而難遺譬如萬貨同市而不嫌其雜百物共春而不厭其繁也論議旣定規例略成而付之手民役將就命不佞以弁首語豈老謬所可堪哉直樂見其成之意幸得遂於須曳無死之日遂不辭而爲之言曰在昔先王置宗伯之府設圖史之局以收管天下之籍爲考俗出治之方而採風於巷求禮於野所以備其遺闕而攝其變遷也歷世增損地理禮文次第可考我國建國深懲前史之多屢世釐裒作輿地勝覺囿八域於一部而古者旣輯今者又古一古一今之間消息迭遞而勝覽難於年記而月錄於是而州各有誌州合而爲國誌聚而爲史史者隨時沿革而急於成者也然則誌豈可緩者哉吾於此別有感焉有州以來撲撲起滅群群往來於大和之中者不知其幾萬億人而寥寥載入於數編之上者果有幾哉人之爲善若是難乎哉旣不可以久生寄於是世其將留名姓於是編以圖其永壽矣此老夫所自傷悼於一生者也玆向吾州之人而說去之以爲爲善者勸焉 歲甲戌重陽節 烏川 鄭淵世序

 

영양지(永陽志)라 함은 영양(永陽)이 고을이 된 까닭에 대한 기록일지니 무엇 때문에 이 고을을 영양(永陽)이라 부르는가? 이는 아마도 이 고을(郡)이 두 물(二水)19)이 두드러진 양지(陽地)이기 때문이다. 여지(輿地)20)를 살펴보면 두(二) 물(水)은 곧 영(永)으로서21), 보현산(普賢山)과 모자산(母子山)에서 발원하여 하나는 동쪽으로 자양과 임고를 휘감아 흐르는 앞 개울(前川)이고 〔또〕 하나는 서쪽으로 신촌과 화동을 적시며 흐르는 뒷 개울(後川)이다. 이것이 곧 우리 영천이 두 개의 물로써 하나의 고을을 이루는 소이(所以)이다. 

영천의 위치와 연혁을 말하자면, 진한(辰韓)이전에는 본래 절야화군(切也火郡) 혹은 골화(骨火) 또는 골벌국(骨伐國)이라고 불렀고, 신라시대에는 이를 임고(臨皐)라 고쳐 부르다가, 고려시대에는 영주(永州)라 하기도 하고 혹은 고울(高鬱) 혹은 익양(益陽) 혹은 영양(永陽)으로 부르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신녕과 합쳐 영천(永川)이라 부르면서 이제 큰 고을의 지리지(地理誌)가 된 것이다. 

예전의 기록들을 보면 두 고을22)의 장고(掌故)23)를 따라 마을(坊里)의 이합(離合)과 관직(官職)의 폐치(廢置)가 이루어졌으므로 이 모두가 시대변천의 소치(所致)가 아님이 없다. 이제 정형식(鄭瑩植), 조규섭(曺圭燮) 두 사람이 개연(慨然)24)히 〔지리지의〕 저술과 편찬을 자신들의 임무로 여기며 생각을 일으켜, 〔지리지 편찬에 필요한 자료를〕 캐고 더하여 〔그 동안의〕 잘못을 통째로 바로잡아 다시 고쳐(繕寫) 이를 장차 고을에 오래도록 전하고자 나에게 서문을 요청하는데, 나는 비록 양추(陽秋)25)의 붓은 아니지만, 그러나 나름대로 마음속에 양추(陽秋)의 떳떳한 도리(彛)는 있는 사람이라 하겠기에 즐겁게 서문을 짓는다. 〔갑술년26) 조승호(曺昇鎬)가 서문함〕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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