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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고깔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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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6.0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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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관 식

작가 

육교(10)

“어느 분과 착각하신 것 같은데 전 마산 바닷가를 지나친 적은 있지만, 살지는 않았어요. 좌옥경, 제 이름이구요. 좌라는 흔하지 않는 성에서 알 수 있듯이 제주도 집성촌에서 어린 날을 보냈고 뭍으로 올라와 뿌리내린 곳이 여기에요. 그러니 마산이라든지 그전에 누구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미경은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들이킨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갑자기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혹시 관심 있는 사람에겐 뭐라도 연관 지어 엮어보려고 한다는데, 지금 그런 건가요? 호호. 전 쉬운 여자니까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요.”

성과 이름이 판이하게 다르지만 아직 의심 살만한 구석은 있었습니다. 미경과 옥경, 이름 끝이 경자로 끝난다는 데서 충분히 질풍노도의 시기에 만남을 떨쳐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은 이미 강한 의협심이 입증되었어요. 물론 부인이 먼저 제안을 하셨다지만 동의하지 않았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육교 밑으로, 생면부지의 사람을 위해 차를 받쳐주기는 정말 쉽지 않죠, 거기다가 찌그러진 차에 한 푼 보상도 없이 의연하게 생활하셨다니까 존경심마저 들어요. 금전적으로 아니면 어떤 보상도 상관없어요. 말씀만 하세요. 거듭된 삶의 의지가 그날 이후로 전투적으로 생겨났으니까요.”

미경에 대한 확신으로 방문하려 했을 때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이것저것’ 시도하려든 계획이 모두가 어긋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왜 미경의 얼굴이 겹쳐져 젊은 날을 소환했는지, 머릿속은 확신으로 꽉 채워져 혼자 북치고 장구 쳤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램프 속 거인에게 소원을 말하듯 참으로 진지하게 얼굴 표정까지 바꿔가며 분명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각, 창밖은 여름몰이에 나선 빗방울이 후득후득 분위기를 띄워주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레 시선이 마주쳤고 동시에 시선이 창밖으로 던져졌습니다. 시선을 떼지 않고 ‘정겹네요.’ 혼잣말처럼 얘기했고 역시 시선을 떼지 않고 ‘가실 때 우산 가져가세요.’ 혼잣말처럼 대답한 것도 같았습니다. 후드득후드득 빗방울이 굵어졌지만 배경과 음향까지 받쳐주는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미경은 어둡다고 느껴졌는지 거실 전등에 불을 밝혔습니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킨 나는, 거리를 좁히기 위해 몸을 앞으로 숙였습니다. 

“오해는 없었으면 합니다. 어떤 보상도 상관없다는 말씀에 용기를 내었지만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네요. 그렇지만 돌아서서 후회하느니 퇴짜를 맞더라도 말씀드리려 합니다. 가정 가진 사람으로 지탄 받아야 마땅하지만, 몸과 마음이 끌리는 데는 어쩔 수 없어서 그럽니다. 미경이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애인 대타가 되라는 건가요?”

“애인은 아니었습니다. 이십년이 흘러도 너무나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기에 애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감히 말씀드려봅니다. 만약 승낙하시면 좌옥경이 아닌 이미경으로 제가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빠른 시일에 마산만 부둣가를 다녀올 예정인데 동행도 부탁드립니다.”

미경은 담배를 피우려다가 다시 담뱃갑 속으로 집어넣었습니다. 알 듯 말 듯 입가에 미소가 잔잔하게 그려지면서 재미있는 게임처럼 눈이 반짝 빛났습니다.

“어쨌든 차수리비보다 싸게 먹히는 건 맞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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