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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풍양조씨 시조 조맹(趙孟)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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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3.15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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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삼 열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문화대학원 교수

풍수지리학 박사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 53-4번지에 가면 풍양조씨의 시조인 조맹의 묘가 있다. 조맹은 태조왕건의 요청으로 70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전투에 나가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으며 이름을 하사 받고 벼슬은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본관은 풍양으로 후손들은 시조이후 실전된 족보를 정리하며 시조의 세거지였던 풍양을 본거지로 삼았다고 한다. 그들은 안동김씨와 함께 조선 후기 세도 정치의 주역으로 숙종 대에서부터 대사헌과 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 많은 관료를 배출해낸 가문이다. 명당 터의 임자는 따로 있다 했던가? 이곳의 묘 터도 파란만장한 우여곡절 끝에 자리를 보전하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 조선 중기 선조 10년(1577)에 선조의 후궁 공빈김씨가 사망하게 되자 왕실에서는 조맹의 묘 바로 위에 묏자리를 잡게 된다. 공빈(1553~1577)의 묘지명은 성묘(成墓)이고 그는 선조의 후궁이며 15대 임금인 광해군과 임해군의 생모이다. 이렇게 되면 원래 왕실의 묘 주변에 있는 묘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이장을 해야 하지만 후궁이라는 조건으로 논란 끝에 선조의 명하에 이장은 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그의 생모인 공빈김씨를 왕비로 추존하게 되니 묘의 호칭도 묘에서 능(陵)으로 격상하게 되어 이번에는 이장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다. 후손들은 이장 예정지까지 정한 상황에서 갑자기 조정에서 왈(曰), 이장은 안 해도 좋으나 대신 봉분을 없애고 그 위에 나무를 심어 평분으로 보존하라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쫓겨나게 되자 그의 생모 역시 왕비에서 다시 공빈으로 신분이 격하되었고 인조 8년(1630) 후손들의 상소로 봉분에 대한 원상복구 승인을 얻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위쪽 공빈의 묘소에는 광해군에 의해 한때 공성왕후로 추존되어 묘지명도 성묘에서 성릉으로 격상시켰기에 그 당시 능(陵)의 격식에 따라 조성된 여러 가지 석물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곳의 산세는 한북정맥의 줄기인 천마산(810.2m)의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 하나가 관음봉을 거쳐 묘소 뒤 현무봉을 일으킨다. 

현무봉에서 혈장까지는 지현굴곡을 하며 힘차게 내려왔고 묘소뒤편에서 과협을 하였기에 혈장에는 많은 생기가 응집된 장소다. 과협은 혈이 형성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풍수에서는 용을 살필 때 잘록한 과협이 있으면 그 후면에는 반드시 혈처가 있다고 판단한다. 풍수고서『인자수지』에서도 참된 과협이 없이 혈이 맺힐 수 없다 하였으며 이것은 용을 따라 흘러오는 기가 한번 잔뜩 움츠렸다가 다시 힘차게 밀고 나가게 하므로 그 후면에는 반드시 혈이 맺힌다. 금성체의 현무봉 아래에 청룡백호가 잘 감싸주어 완전한 장풍국(藏風局)을 이루고 있다. 안산을 비롯한 혈장주변에는 문필봉과 노적봉 등 순하고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많아 풍수가에서 이곳을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날아간다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묘소아래 끝자락에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진응수(眞應水)가 흘러나온다. 이것은 혈장의 기운이 넘쳐흐른다는 것으로 풍수에서는 진응수를 진혈의 증거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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