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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연재] 청송심씨의 시조 심홍부(沈洪孚)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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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2.1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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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삼 열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문화대학원 교수

풍수지리학 박사 

경북 청송군 청송읍 덕리에 가면 청송심씨의 시조 심홍부의 묘소가 있는데 이 묘를 최초 조성한 경위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고려 충렬왕 때 문림랑(文林郞)으로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역임하였으나 나머지 행적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전하지 않고 그의 증손 심덕부에 이르러 청송을 본관으로 삼았다고도 한다. 

 

심덕부의 다섯째 아들이 심온인데 심온의 딸이 세종의 비 소헌왕후(1395~1446)이고 그들은 조선조에서만 상신 15명, 대제학 2명, 왕비 3명, 부마 4명, 영의정 9명 등 많은 관료들을 배출하며 명문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심홍부의 묘역은 조선시대 이래 청송심씨 가문이 번성하는 과정에서 후손들에 의해 여러 차례 단장되고 새로운 시설이 추가로 조성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세종 때 소헌왕후를 위해 임금이 부사 하담에게 명하여 보광사 절 아래에 만세루(萬歲樓)를 지었는데 이곳은 심흥부의 묘에 제사 지낼 때 비가 오면 용전천의 범람으로 묘소 진입이 어려워 이 누각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보광사는 신라 문무왕 8년에 의상대사가 건립 하였고 청송심씨 시조묘를 모시는 사찰이다. 

소헌왕후를 배출한 청송심씨(靑松沈氏) 가문은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그의 아버지가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에 봉작되었고, 상왕 태종은 그를 44세의 나이에 이조판서에서 영의정으로 임명하였지만 그가 보낸 사약을 받고 죽은 비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심홍부의 후손들은 그의 증손대에 이르러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조선 초 심덕부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우고 좌의정에 올라 대대로 서울에 살면서 벼슬을 지낸데 비해 동생 원부는 두문동에 들어가 은둔하면서 자손들에게 조선의 녹을 먹지 말라고 유훈을 남기고 고향에서 부를 이루어 청송의 만석지기 심부자로 명성을 떨친다. 

 

지금도 청송을 비롯한 영남일대에 흩어져 사는 심씨들은 대부분이 동생 원부의 후손들이다.

보현산의 한쪽 자락이 북쪽으로 뻗어나가 보광산(435m)을 일으키고 여기서 계속 북진하여 파천면 신흥리에 이르러 이 묘소의 현무 봉(420m)을 만든다. 이 봉우리에서 동남쪽으로 하나의 가지를 뻗어 유혈로 혈장을 맺었다. 

묘의 당판은 매우 급경사지로 이곳의 혈을 주위에서는 괘등혈이라 하는데 등잔불처럼 가파른 산 중턱에 걸려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괘등혈은 속발속패가 특징이지만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 하여 등잔 밑은 어두우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은 밝아 고향에 거주하는 사람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후손들이 성공한다는 속설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가파른 산 중턱에 걸려있는 혈이라 해도 용맥이 급하게 내려오다 혈을 맺을 때는 어느 정도 평탄해진 곳이어야 하는데 이곳의 혈처는 경사가 심해 묘소 아래에 축대를 쌓아 인공적으로 당판을 만들었다. 

본인의 식견으로는 전형적인 괘등혈로 보기엔 약간의 무리가 있고 혈장 주변에는 뚜렷한 혈증도 찾을 수가 없다. 묘소의 좌향은 신좌을향(辛坐乙向)의 동향이며 앞쪽의 조안산은 금형봉을 이루어 부를 예약하고 아름다움을 더해주지만 맑은 날은 안산 넘어 작은 규봉(窺峯)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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