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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나누미칼럼] 익양지 제6권 - 인물(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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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2.01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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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진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 원장 

우(友)

이리룡(李利龍) 쌍계 영근의 뒤. 천성의 자품이 근후(謹厚)하고 우애(友愛)가 절륜하였다. 백형과 더불어 아침저녁으로 시를 주고받고 경전의 뜻을 강의하고 토구하였다.

조광환(趙光) 가선대부 홍훈의 뒤. 우애가 두텁고 지극하여 아우인 광구 광림과 더불어 책상을 연이어 학문을 강마(講磨)하면서 기쁘게 즐겼기에 (사람들은)그 집(堂)을 일러 체련(棣連)이라 하였다, 직급은 통정대부.

 

노병기(盧炳基) 소암 수의 뒤. 호는 제우당. 효성과 우애가 높고 두터워 향리(鄕里)가 경중(敬重)하는 바가 되다.

이두표(李斗杓) 처야당 언기의 뒤. 천성으로 효우(孝友)하여 종제(從弟)인 만표와 같이 살고 같이 밥 먹기를 60여년을 하면서, 먼 친척에 이르기까지 화락하고 화목하기에 (이간질 할)틈이 없었다.

 

조익승(曺익承) 돈후(敦厚)하고 자상(慈詳)하며 남들과 더불어 거스르지 않았다. 형제가 우애하여 아침저녁으로 같이 거처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두 아들로 하여금 밭 갈고 나무하게 하여, 그것으로 (음식 등을)공여(供與)함에 반드시 형을 먼저 한 이후에 자기로 하게하며, 비록 하나의 작은 음식이라도 또한 (형보다)먼저 맛보지 않았다.

 

이수한(李守漢) 덕산인. 온혜공 사맹의 뒤. 호는 낭촌. 성품이 침중하여 두 형과 더불어 우애가 더욱 돈독하였다. 무른 자신은 수척하더라도 형을 살찌게 함에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학문이나 글쓰기 등의 일은 우선 급하지 않는 일(餘事)로 여겨, 또한 또래 벗들의 추중한바가 되었다.

 

조병륜(曺秉倫) 헌직의 현손. 천성이 순수하고 삼갔다. 가정 형편이 지극히 가난하여 근검(勤儉)하고 수약(守約)98)하였다. 형이 일찍 죽어 두 아우들과 더불어 우애가 더욱 두터웠다. 아침저녁으로 서로 마주하면서 머리가 하얗게 세도록 화목하고 즐거웠기에 사람들이 공경한 바가 되었다.

 

서일상(徐日祥) 양인(良人)인 막동의 아들. 나이 12세에 형인 정남과 더불어 산에 올라 나무를 하는데 범이 뛰쳐 와 정남을 물었다. 일상이는 호곡(號哭)하며 낫을 휘둘러 바로 범의 정수리를 때리니 범은 이에 그 물었던 것을 버리고 달아나기에 드디어 (형인 정남을)부축하여 집으로 돌아 와 목숨을 건졌다. 도신(道臣)이 계장(啓狀)으로 보고하여 급복(給復)되었다.

 

열(烈)

이씨(李氏) 권성필의 아내. 연산조 남편이 죽임을 당하고 이씨는 몰락하여 관비(官婢)가 되었다. 남편의 죽음은 (남편의)죄가 아니었기에 언제나 스스로 죽고자 하였지만, 어머니가 그리 하지 못하게 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더럽히고자 하면 이씨는 언제나 작은 칼을 차고 다니면서 스스로 방비하여 끝내 (그녀를)범하지 못했다. 중종2년에 정려(旌閭)를 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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