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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깔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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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2.28 17:59
  • 수정 2022.12.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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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깔을 쓴다

욕조(1)

미주가 결혼을 했다. 초대받지 못한 나는 두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도착했다. 조금은 침울했고 ‘파토나 나버려’라는 주문을 입안에 오래도록 머금고 있었다. 침을 뱉고 싶었지만 주문이 묻어나올까, 참았다. 말없이 구석진 곳에 비치된 정수기 앞으로 다가갔다. 고깔 종이컵이 뾰족하게 테이블에 탑처럼 쌓여있었다. 한 개를 뽑아 정수기 버턴을 눌렀다. 고여 드는 물소리가 새로웠다. 입안에 고인 침을 넘기고 주문도 넘겼다. 미주의 불행을 염원하는 간절한 주문이 온몸 구석구석 퍼져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길 소원했다. 

신부 측 접수처에 오만 원 지폐, 오천 원 지폐를 넣은 봉투를 건네주었다. 축의금 장부를 기재하며 잠시 혼선을 주고 싶었고 무엇보다 특이한 축의금이면 분명 미주에게 전달될 것이라 믿었다. 식장에 들어가 착석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어슬렁어슬렁 신부대기실을 찾고 있었다. 웨딩홀 주변에서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벗어나자 통로로 이어지는 곳에 신부대기실이 보였다. 왠지 몸을 낮추어 통로를 타고 다가갔다. 문을 활짝 열어둔 곳에 미주가 앉아 있었다. 다행히 눈을 맞추지 않았기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미주가 축복을 받으며 앉아있었다. 

며칠 전에도 내 품속에서 잠든 미주이지 않는가. 

“결혼을 해야될까봐. 오빠.”

무슨 소리냐는 투의 뚱한 표정으로 미주를 쳐다봤다. 

“아빠 친구 분 아들이야. 이번에 인턴딱지를 떼고 개원의로 나가는데 아빠가 글쎄, 병원 건물을 얻는데 반을 덜컥 투자했어. 내게 상의도 없이, 그러군 뭐라는지 알아? 서둘러 결혼을 하래. 내가 그랬지. 난 아빠의 소유품이 아니에요.” 

그나마 일 센티 남은 자존심으로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미주의 귓밥을 만지작거렸다. 

“허긴 내 곁에 있어봐야 꽝인 미주의 앞날에 무지개가 뜬 거지. 잘해봐. 우린 어차피 엔조이였으니까. 내게 미련두지 마. 서로의 갈 길은 정해졌잖아.”

“오빠가 마음 흔들리게 한번 잡아주면 안 돼?”

“잡긴! 사실 난 미주가 아내로서 부담스러웠어. 이로써 깔끔하게 정리가 되네. 대신 오빠를 영원히 못 잊도록 수컷의 야성을 느끼도록 해주지.”

 

그리고 얼마 후 미주의 결혼을 몇 명의 지인을 건너서 전해 들었다. 머리끝이 바짝 서는 분노를 느꼈지만 곧 화를 누를 수 있었다. 무능이란 서로의 인연에 마침표를 찍기에 충분하니까. 교원자격증 시험에 몇 번 떨어진 덕분에 방과후 교사로 지금은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세울 것 없는 자격지심이 스스로의 위치를 깨닫게 해주었다. 신부대기실에 앉아있는 미주는 닿을 수 없는 저쪽의 사람으로 탈바꿈을 꾀하고 있는 모습이 확연하게 수긍이 되었다. 그것에 대한 초라함과 나약함과 무능함이 나를 대변하는 지금의 모습이기도 했다. 

더 이상 무너지지 말자며 서둘러 예식장 밖으로 나왔다. 오늘 본 미주는 강렬했고, 일 년여 사귀며 안았던 미주는 허전했던 옆구리였을 뿐. 어디로 갈까 잠시 망설였다. 친구도 술도 부르기 싫었다. 그러면 백기 항복하는 비참한 꼴밖에 지나지 않으니까. 핸들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현관 앞에서 아래층 사람을 만나 목례를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위층 사람을 만나 좋은 날씨에 동감을 표했다. 집안으로 들어와 욕조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미주의 체취마저 씻어내고 싶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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