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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역사(山南義陣歷史)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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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2.21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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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역사(山南義陣歷史) 91

산남의진은 구한말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의병 활동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의병활동이다. 해방 후 인물 중심의 사관(史觀)에서 다룬 국사대관(國史大觀 이병도 지음), 국사정해(國史精解 박태석 지음), 최신중학국사(最新中學國史 남도영 지음), 국사의 신연구(정문사 편집부 지음), 한국사사전(사회학과 사서간행회 지음), 최신국사(강수원 지음), 한국독립투쟁사 등에는 의병대장 정관여(鄭官汝)를 언급하고 있다.

해방을 맞이한 1946년 정용기 대장을 비롯한 창의부대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전사한 입암전투지에서의 위령제를 시작으로 그 동안 많은 선양작업이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작금에도 여전히 산남의진은 아는 사람만 안타까워하는 역사의 한 페이지다. 2013년 산남의진 제4차 결집지라는 이유로 현충시설로 지정된 거동사에서의 위령제 이후로 인연을 맺어 다양한 방법으로 10년의 세월을 산남의진 천양(闡揚-드러내어 밝혀서 널리 퍼지게 함) 작업을 펼쳐왔으나 여전히 답보상태임은 부인 못할 사실이다. 주변에서는 애쓴다고 격려하는 분들이 적지 않으나 조금만 나아가면 여전히 산남의진이 무슨 단어인지 생소하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거언 40년을 숨죽여 살아오셨던 그 의사들의 삶을 생각하면 차마 그만두지도 못하겠거니와 어영부영할 수도 없다.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나에게 주어졌으니 숙명이랄 밖에 달리 해석할 수도 없다. 열정이 통하여 국가보훈처에서 2020년 학술대회, 2021년 ‘역주 산남창의지’ 발간, 2022년 ‘산남의진뎐’ 발간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고, 영천시에서는 매년 백일장 사생대회를 치를 수 있도록 후원하고 있다. 내년에는 어린이 청소년들을 위한 만화책도 내고, 뮤지컬 공연도 해보고 싶다. 대장을 비롯한 이름 적힌 500여 의사들뿐만 아니라 무명의 2천, 3천 의사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는 산남의진 공원을 조성하여 후손들에게 영원히 잊혀지지 않게 하여야 할 일이다.

이번 “산남의진뎐”이라는 기억 스토리텔링 책을 발간하면서 몰랐던 일들을 다시 알게 되었다. 대장의 후손이 알려온 내용을 보면, ‘1907년 11월 16일 2대 대장 동엄 정환직 선생께서 순국하시자 일본군은 양세대장의 가족들을 몰살시키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래서 장손인 정호용은 가솔들을 이끌고 산남의진 본부가 있던 북동대산으로 피신하여 화전민 생활을 하였다. 당시 차남 노용은 6살, 3남 상용은 3살, 4남 태용은 생후 3개월이었다.’ 하니 그 삶의 곤궁함은 익히 짐작하고도 남겠다. 

1907년 음력 12월 말경 진중일지를 전담하였던 김상구 의사가 부하들을 데리고 영천을 떠나게 되자 당시 북동대산으로 와서 정용기 대장의 장남 정호용(당시 15세)에게 그 일지를 맡겼다 한다.

1927년 우여곡절 끝에 고향에 정착한 정호용 선생은 충효학원을 설립하고 마을 자제들을 가르쳤는데, 1934년 1월에 정호용 선생이 참동계의 도움을 받아 충효재를 건립하고 1939년 2월까지 그 일을 계속하였다. 충효재는 외관상 시골의 한적한 서당같이 보였으나 수많은 산남의진 생존 의사들이 국내외와 연락을 주고받는 비밀기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정호용 선생은 충효재를 관리하면서 김상구 의사가 맡긴 진중일지와 정순기 의사가 가지고 있던 자료를 충효재 마당에 항아리를 묻은 뒤 그 속에 숨기고서 해방이 될 때까지 산남의진에 참진하였던 분들의 이름과 자료를 계속하여 찾아 모았다. 

1946년 2월15일 대한광복회에서 위령제를 지낸 후, 정순기 의사, 우재룡 의사, 정호용 선생이 산남의진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데 뜻을 모으고 정순기 의사의 주도로 ‘산남창의지’를 발간하게 되었다. 집필은 이병락, 안종기 씨가 맡고, 의심스러운 부분은 참진의사였던 정순기, 우재룡, 이순구, 홍구섭, 정호용 의사 등의 증언을 토대로 정리하였다. 책이 완성되자 이순구 의사가 후지(後識)를 썼다. 후지는 지금 말로 편집후기 쯤으로 봐야 할까? 산남창의지는 이형표 의사 댁에서 100부를 인쇄하였다 한다.1971년 독립운동사 자료집에 “산남의진사 이순구 엮음”이라고 수록하였으나 이렇게 많은 전말(顚末)이 있었는데, 이 사실을 모르면 ‘산남창의지의 저자를 이순구’로 오인한다는 말씀이다.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다만 산남의진을 선양(宣揚)을 넘어서 천양하겠다는 사명감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오류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역사 앞에 자못 잘못된 행위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어렵다. 아! 산남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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