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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이씨 중시조 이장경(李長庚)의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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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2.07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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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이씨 중시조 이장경(李長庚)의 묘소 

성주이씨 시조 이순유(李純由)는 신라 말 문성왕 때 이부상서(吏部尙書)였다.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하자 망국의 한을 품고 충절을 지켜 고려조에서는 벼슬도 하지 않았으며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쳐 성주 땅에 은거하였다. 

이극신의 내력은 ‘隴西郡公李先生神道碑銘’에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태조 왕건은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는 틀림없다”하여 그를 고을의 호장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순유의 12세손이고 고려 고종때 성주의 호족 가문에서 태어난 이장경은 부친 이득희의 호장을 승계하였으나 생전에는 큰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고 다섯 아들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의 고위관직에 올랐기에 사후 작호가 흥안부원군에까지 추증되었다. 

 

맏이 백년(百年)의 벼슬은 밀직사사(密直司事), 둘째 천년(千年)은 참지정사(參知政事), 셋째 만년(萬年)은 시중(侍中)을, 넷째 억년(億年)은 유수(留守)였고, 다섯째 조년(兆年)은 예문관 대제학을 지냈으며 성산군에 봉해졌다. 이러하여 후손들은 그가 성주이씨 가문의 중흥에 큰 역할을 하였다하여 이장경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다. 특히 다섯 번 째 아들 조년(兆年)은 시 짓는 솜씨가 뛰어나 그의 시 한 수(多情歌)가 지금까지도 전한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은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만은 다정도 병 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만성보(萬姓譜)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가문은 이장경 이후 8世 안에 대재학(文衡)이 18명, 봉작 받은 사람이 11명, 상신(相臣)이 15명, 또 식읍(食邑) 받은 이가 5명, 부마(駙馬) 2명, 문과급제자가 75명에 달하고, 생원진사 그리고 음보(蔭補)로 출사한 사람은 손으로 다 꼽을 수 없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장수로 4만 여명의 원군을 이끌고 우리나라에 와 많은 공을 세운 이여송장군도 성주이씨의 후손이라 한다. 이장경의 묘소는 원래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신석산(742m) 비호석봉(非乎石峰)에 조성되어 있었으나 그곳이 천하명당으로 알려지면서 세종의 왕자 태실이 들어오게 되자 하는 수없이 1443년 대가면 옥화리 19번지 능골 오현으로 이장하게 되었다. 옥화리 능골은 최근에 후손들이 중수한 오현재의 바로 우측 능선으로 봉분은 부인 합천이씨와 상하로 배치되어 있다. 

 

봉분 앞쪽으로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놓여 져 있고 장명등, 망주석, 문인석 등의 석물도 갖추어져 있다. 1960년 후손들이 건립한 묘비 앞면에는 ‘隴西郡公李先生之墓 配陜川郡夫人李氏祔下’라고 되어있어 이장경의 묘소임을 바로 알 수 있고 뒷면에는 후손들이 비석을 건립하면서 기록한 후기가 새겨져 있다. 

 

성주이씨 후손들은 이곳에서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시제를 올리며 그를 기리고 있다. 후손들의 입장에선 돌혈의 천하명당으로 알려진 신석산의 원래 보금자리를빼앗겨 아쉬움이 있겠으나 그 당시 태실지를 구하던 지관이 최고의 명당으로 왕실에 보고하였고 왕명에 의해 태실지로 지정되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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