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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양지 제6권 - 인물(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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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11.3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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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양지 제6권 - 인물(人物)

효(孝)

김영필(金英珌) 충간공 보의 뒤. 어머니의 나이 104세에 이르러 정신이 혼미하여 능히 동작을 하지 못했다. 이 때 영필의 나이 이미 60여세임에도 낮 밤으로 (어머니를)부지(扶持)하여 잠시라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세월이 흉년을 만났지만 달고 맛있는 음식을 떨어지지 않게 하였고, 급기야 초상에 피눈물로 곡을 하며 아침저녁으로 성묘하여 사림들이 예조에 정장(呈狀)하여 동몽교관으로 제수 되었다. 

 

노정열(盧鼎烈) 진사 수의 뒤. 천성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가 큰 종기가 나서 몇 년을 고생하여 백방(百方)이 무효였다. 매일 종기를 (입으로)빨아내어 완치하였고, 초상에 애훼(哀毁)3년 안에 비록 비바람이 치고 춥고 덥다 해도 성묘를 폐하지 않았다. 묘 앞에 바위가 있어 사람들은 효자바위(孝子巖)이라 불렀다. 

 

김봉채(金鳳采) 명산 응생의 뒤. 어려서 재예(才藝)가 있었다. 어버이 모심에 효성이 지극하였고 아버지의 병 일 곱 달 동안 똥 맛을 보며 하늘에다 기도하였다. 아버지가 물고기를 먹고 싶어하자 얼음 위에서 울고 있으니 메기가 뛰어 나오기에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드렸더니 효험이 있었다. 이 사실은 문헌록에 실려 있다. 

 

이덕재(李德載) 남곡 석지의 뒤. 효우(孝友)가 하늘에서 나와 아버지의 병에 똥을 맛보고 산에서 기도하여 정성을 다 하였다. 신령스런 사람(神人)이 고하기를 ‘병에 기도한들 소득이 없으리라’하면서 묻힐 곳(葬地)를 가리킨다. 초상에 이르러 여묘살이 3년을 하여 사림들이 감영에 글을 올렸다.

 

박천근(朴天根) 밀양인. 정언 하징의 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효도로 편모를 모셨다. 집안이 비록 가난해도 봉양하는 물건은 갖추지 않음이 없었다. 어머니가 병이 나서 붕어고기를 생각(먹고싶어)하는데 마침 한 겨울이라 강에 가서 하늘에다 비는데 홀연히 얼음이 녹으면서 붕어가 뛰어 나온다. (붕어를 가지고)집으로 돌아와 드렸더니 차도가 있었다. 사림들이 본 고을과 감영에 글을 올려 모두 포상하는 글(題)이 있었다.

 

김세희(金世熙) 정숙공 인경의 뒤. 호는 서암.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기질로 정성과 효성이 두텁고 지극했다. 어머니 병에 향을 피워 하늘에 자신으로 대신해 달라 빌었으며, 어머니가 산 꿩(生雉)을 원하는데 마침 집에 있던 개가 한 마리의 꿩을 뒤 쫒자 꿩이 똑 바로 날아서 솥 안으로 들어오기에 사람들은 효감(孝感)의 소치라 일렀다. 사림들이 여러 번 예조에 글을 올렸다.

 

이필운(李弼運) 군수 희복의 뒤. 천성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 병 5년에 낮 밤으로 하늘에다 자신으로 대신해 달라 빌었다. 병이 더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먹여 소생하였고,초상에 이르러 애훼(哀毁)함이 제도를 넘고 읍혈(泣血)3년에 고을과 도의 사림들이 글을 올렸다. (이 사실은)금석록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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