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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 열전(山南義陣 列傳)72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20.07.0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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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대장은 산남의진을 창의하면서 사기를 돋우기 위해 군가를 지어 불렀다. 다시 한 번 그 가사를 찾아 읖조려 본다. 노랫말마다 나라를 위한 의기가 넘친다. 곡(曲)이 남아있지 않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1. 백두산 벋어내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 동산에 역사 반만년 / 아름다운 금수강산 단군님 터전 대대로 이어받은 이천만 우리 / 나가자 힘을 모아 왜적을 쳐서 조국의 독립 찾아 자유 누리자
2. 억만년 자리 잡은 대한의 자손 침략의 역사 없는 백의민족들 / 나려 이후 왜구가 침노하더니 임진왜란 가신지 몇 년 되었나 / 나가자 힘을 모아 왜적을 쳐서 조국의 독립 찾아 자유 누리자
3. 도이의 소추가 또 쳐들어와 아름다운 이 강산을 더럽히었네 / 조상에 이어받은 재주와 용기, 힘을 모아 왜적을 쳐부수어라 / 나가자 힘을 모아 왜적을 쳐서 조국의 독립 찾아 자유 누리자 /
4. 보아라 이 강산에 밤이 새나니 이천만 너도나도 함께 나가세 / 광명한 자유독립 탈취한 다음 태극기 높이 들고 만세 부르자 / 나가자 힘을 모아 왜적을 쳐서 조국의 독립 찾아 자유 누리자.

조양동(趙良洞)
생존기간: 1908;33세~1908.4.15. / 출생지: 미상 / 운동계열: 의병 / 훈격: 애국장(1995)
공적내용: 의병으로 경북 흥해(興海)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및「한일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그들의 지배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조양동은 일본군을 축출할 목적을 가지고 의병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의병활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수단으로 1908년 4월 13일 30여 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경북 흥해군 북안면(北安面) 수성동 등지에서 친일 동장 등에게 군자금을 수차례 징수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를 탐지한 대구경찰서 경찰대의 기습을 받아 교전하던 중 8명의 동료 의병이 피살되고, 그는 동지 이주발(李周發) · 차경수(車敬守) · 김수달(金守達) 등 3인과 더불어 피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같은 달 15일 피체된 동지 이갑이(李甲伊) 등과 더불어 소도(小刀)를 차입하여 포승을 절단한 후 탈주를 기도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한국독립운동사자료(국사편찬위원회) 제10집 270∼272면

차경수(車敬守)
생존기간: 1908;22세~1908.4.15. / 출생지: 미상 / 운동계열: 의병 / 훈격: 애국장(1995)
공적내용: 의병으로 경북 흥해(興海)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같은 해 8월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차경수는 이 같은 시기에 의병운동에 투신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의병활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수단으로 1908년 4월 13일 3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경북 흥해군 북안면(北安面) 수성동에서 친일 동장에게 군자금을 수차례 모집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를 탐지한 대구경찰서 정찰대의 기습을 받고 교전하던 중, 8명의 동료 의병이 피살되고, 그는 동지 이주발(李周發) · 조양동(趙良洞) · 김수달(金守達) 등 3인과 더불어 피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같은 달 15일 피체된 동지 이갑이(李甲伊) 등과 더불어 소도(小刀)를 차입하여 포승을 절단한 후 탈주를 기도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0집 270∼27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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