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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나누미칼럼]4. 문헌으로 살펴본 노계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18.07.19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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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행록도 없으면서 이 원고가 정리되어 이루어진다면 (행록과 원고가 어느날)나란히 인간(印刊)될 줄을 알겠습니까?

 

불초는 이것이 후회되어 감히 그대의 은혜를 바라오니 그대는 (우리들을)이끌어 주시오’ (그리하여)내가 일어나 말하기를 ‘무하옹의 행장을 날 보고 만들어 달라고? 나는 그만한(자질을 갖춘)사람이 아니며 (만일 행장을 쓰게 된다면 무하옹의)성한 아름다움(盛美)을 (제대로)드러내어 찬양하지 못할까(걱정되어)감히 사양하네’(라고 하였더니)성규가(나에게)향정(鄕井)의 정의(情誼)로서 (행장 만듦을)재촉하기를 그만두지 않기에, (부득이하게 나는)드디어 손을 씻고 기록하노니, 공의 휘는 인로(仁老)이고 자는 덕옹이며 무하(無何)는 스스로 지은 호(自號)이다. 밀직(密直)의 박씨는 고려시대부터 (명성이)드러났으니 비조(鼻祖)이신 휘 중미는 공훈과 업적(勳業)이 있어 (임금께서)보리공신(輔理功臣)이라는 호(號)를 내리셨다.

 

여러 세대를 지나 휘 연은 집경전(참봉으로) 제수되었으며 이분이 승사랑인 휘 윤청을 낳았고 이분이 휘 석 (벼슬은)승의부위(를 낳았으니)이분들이 공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시다. 부위(副尉)(공께서는 참봉 주순신(朱舜臣)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가정(嘉靖) 신유년 6월 21일에 공을 영양(永陽) 도천리의 집에서 낳으셨다.

 

주씨께서는 임신 중 이상한 꿈이 많으셨으며, 급기야 태어나서는 (사물의 이치에)밝고 통달함이 신(神)과 같아 글자를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능통하게 풀이(能通解)하였고, 다른 사람들이 (유교)경전이나 역사서 외는 것을 들으면 곧바로 기억을 하였다. 점차 아이가 되자 문장을 지었는데 일찍이 대승(戴勝)을 주제로 시를 지어 말하기를 ‘저 아름다운 집의 용마루(屋角)에서 우는(뻐꾸기여), 영원히 사람들로 하여금 농사짓기를 권하는 새도 있음을 알게 하네’라고 하자,(이렇게 시를 짓는 것을)본 사람들은 놀랍고 기이하게 생각했다. 임진왜란 시 (왜적의 침입에 대하여)강개(慷慨)하여 붓을 던지고 융마(戎馬)사이를 출입하자(投筆出入戎馬間) 사람들 모두 말하기를 ‘이 사람에게 무략(武略)이 있었던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맨손에 무기가 없는 데다 또한 전공(戰功) 다투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앞 뒤(의 전투에서 적을)죽이고 얻은(전리품을)일찍이 예에 따라 (죽인 사람의)귀를 베어 바치지 않아 겨우 (선무)원종공신록권의 끝자리에 기록(參原從末錄)되었다.

 

무술년에는 강좌(江左)의 절도사인 성윤문이 공의 명성을 듣고 자신의 군막으로 부르자 공은 늘 적들의 정세(賊情)에 대하여 논의하니 (성)윤문은 손바닥을 치면서 칭찬하였다.

 

이해 겨울 적들이 바다로 도망을 가 숨어버리자 공은 태평사를 지음으로써 사졸(士卒)들을 위로하였다. 기해년에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수문장으로 제수되었다가 다시 선전관으로 옮겼으며, 임기가 다 하지 않아 조라포(助羅浦) 만호(萬戶)로 승차(陞差)되어 (임지로 부임하였더니 조라포는)바다에 연이은(沿海) 하나의 잔약한 진채(殘砦)여서 사졸(士卒)들은 부박(掊剝)에 힘들어 거의(이 고통을)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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