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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나누미칼럼]노계 박인로(3)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18.05.17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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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 둑을 조금 지나 첫 번째 구비에서 만나는 마을은 용화리(龍化里)다. 용화리는 기룡산의 천년고찰인 묘각사(妙覺寺)로 통하는 마을인데, 이곳의 지형(地形)은 사방이 산으로 가로막혀 있어 오직 하늘로만 길이 통한다는 소 천옥(小天獄)이다.

 

 

지금도 이 마을엔 경주이씨 등의 몇몇 가구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마을 안 운태골(雲台谷)에도 예전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살았었지만 지난 1970년 초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독가촌(獨家村) 정리사업의 일환으로 대처(大處)로 소개(疏開)되어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용화리를 지나면 만나는 곳이 자양면 소재지인 성곡(聖谷).

말이 면소재지이지 지난 1979년 영천댐 공사 이후 노항 토골 성곡 용산 신방 등 큰 마을 대부분이 수몰되어 현재 남아 있는 사람들은 천 여 명에 불과하다. 면소재지를 지나 만나는 동네가 원각(元覺)이다. 기룡산 아래 대부분의 마을들은 불교(佛敎)와의 인연이 깊다. 그래서인지 마을 이름 또한 불교와 깊은 관계가 있어 보이는데 그 가운데 원각(元覺)이 있다.

 

이 마을은 벽진이씨(碧珍李氏)가 집성(集姓)을 한 곳으로 조선 초기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산간으로 숨어든 대표적인 여섯 분의 충신 중 한분이신 경은 이맹전 선생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과거 벽진 이씨는 지금은 물에 잠겨버린 노항 큰 마을과 토골 용산리 등에 다수가 살고 있었다고 전한다. 원각리에는 경은 선생을 제향하는 용산서원과 한말 한학자요 항일운동을 하신 경은 선생의 후손인 명암 이태일의 기념비가 있다.

 

원각을 지나면 만나는 곳은 충효리(忠孝里). 본래 검단이라는 이름의 이 마을이 세간에 알려진 것은 구한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일으킨 정환직 정용기 부자 때문이니, 곧 충효리(忠孝里)는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고향마을이다. 이곳은 보현산 남쪽에서 발원한 개울과 입암 두마 등지에서 흘러나온 자호천(紫湖川)이 합류하는 곳으로 여기서부터 영천댐이 시작된다.

 

다시 자호천을 거슬러 오르면 어느새 69번 지방도로와 31국도가 만나는 지점에 이르게 되는데, 여기서 곧장 동북으로 난 국도31번을 따라 오르면 머잖아 입암과 만나게 된다.

 

죽장면 소재지인 입암 마을 입구 삼거리에서 69번 지방도를 따라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드디어 선바위의 마을인 입암(立巖)이다. 앞인 남쪽과 뒤인 북쪽은 동서로 횡단하는 산맥을 이루며 첩첩의 봉오리는 하늘을 찌른다.

 

물이 시작되는 곳. 그야말로 산간 오지마을인 입암. 입암마을 앞을 횡류(橫流)하는 가사천은 천년을 하루 같이 흐르고 있다.

 

사람 하나 살지 않던 이 산중에 살 뜻을 지니고 찾아든 이는 권극립(權克立)과 손우남(孫宇男). 당초 권극립이 살던 곳은 지금은 영천시 언하2동으로 부르는 새미 즉 천미(泉味)마을이며, 손우남은 영천시 임고면 매호리 동산(東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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