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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瑞午 칼럼]히로시마(廣島) 원폭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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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5.27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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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오 최 홍 준 본지 논설고문 방송작가, 중앙초등 7회 졸업 전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 협의회장
 

“내가 시집 온지 반년도 채 못 되었을 때 영천성당에 계시던 삼촌께서는 나를 낯선 곳에 혼자 남겨두고 일본으로 떠나시게 되었다. 시어머님의 허락을 받고 시누이 베르나데타와 함께 영천역에 가서 삼촌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려니 눈물이 비 오듯 앞을 가렸다.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는데, 떠나시던 삼촌께서 다시 오시어 나를 위로하시며 ‘아부지 편지 왔나?’하시더라. 그때의 슬픔과 적막함은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내 어머니께서 하신 이 말씀이 구남매 문집 「서로 사랑하여라」(1998, 두레, 231쪽)에 수록돼 있다. 여기서 말하는 어머니의 삼촌은 영천읍내에 처음으로 천주교 성당이 설립돼 프랑스 선교사 프르와드보 레이몽 조(Froidevaux Raymond, 趙文道)신부가 첫 주임사제로 임명된 1936년 초대 전교회장 겸 복사(服事)로 부임한 김수욱(金秀旭, 미카엘) 할아버지시다.

우리나라 초대교회 시기에 복사의 역할은 퍽이나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미사를 보조하는 역할 이외에도 선교사의 한국어 교사요, 길 안내자이며 번역가이기도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동할 때 미사도구 등 짐도 져주는 하인의 역할까지 모두 그가 담당했다. 아예 선교사와 함께 숙식을 같이 하면서 죽기까지, 그러니 성인 다블뤼 주교와 순교도 함께 한 황석두(黃錫斗, 루카) 성인 같은 이가 박해시기 한국교회 복사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미카엘 할아버지는 박해시기는 이미 지나 있었지만, 그때 영천성당에서 사제를 도와 선교활동에 전념한 분이시다. 그런데 공적인 활동 외에도 우리 집안과 특별한 관계를 맺은 일이 있으니, 청년신자이던 우리 아버지(崔南植, 사도 요한)와 당신의 조카인 어머니 김 막달레나(金末連)와 혼인의 연을 맺어준 덕분이다.

1939년 음력 2월 28일 규수 측 본당인 왜관 낙산동 가실성당에서 혼인미사를 봉헌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 바로 그해 가을, 당신의 삼촌이 영천을 떠나시자 우리 어머니는 그토록 서러워하셨다고 위에서 소개했다. 시집살이가 힘들었던 그 시절, 비록 삼촌이기는 해도 아버지와 다를 바 없이 따랐으며 의지했던 친정 어른과 이별한 것이 아쉽고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날 영천역까지 동행했던 어머니의 시누이요 나의 큰고모이신 베르나데타(최잠순)님은 지난 2월 89세로 선종하셨다. 우리 아버지의 증언을 들어보자.

“특히 그해 부활 때 수십 명의 영세자를 내기도 하셨는데, 일본 히로시마(廣島) 교구장 초청으로 내가 결혼하던 그해 초가을 급거 도일하셔서 재일본 조선인들의 전교에 열중하시면서 한약국을 여시어 선교와 병행하면서 큰 성과를 거두셨다(「서로 사랑하여라」, 223쪽 이하),

그러니 미카엘 회장은 나에게는 외종조부(外從祖父)가 되신다. 이 어른이 한약국을 개업하신 데에는 사연이 있다. 당신의 부친이며 우리 외조부의 부친이기도 하신 김희두(金喜斗 베드로, 1872-1950) 할아버지가 고향에서 낙산약국을 경영하며 가실성당 설립에 땅을 제공하고 종을 봉헌하는 등 깊이 공헌한 분이었고, 장병화 주교, 서정길 대주교 등과 함께 사제수업을 받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중도에 그만 둔 ‘신학교 출신’(Ex Seminarista)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전수 받아 한의사가 됐던 것이고, 히로시마에서 잘 나가던 중 1945년 여름 고향의 부친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게 된다.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전세가 일본에 불리하면서 험난한 시국을 염려하신 고국의 엄친께서 한시바삐 귀국하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미카엘 처삼촌께서는 순명하시어 그 많던 약제(藥劑)와 모든 재물을 일본 땅 히로시마에 고스란히 남겨두고 급거 환국하셨다. 귀국 직후 히로시마에 미군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일시에 수많은 인명이 살상됐다. 사십여 년이 지난 이날까지 우심한 그 후유증으로 많은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는 엄청난 그 재앙을 극적으로 모면하게 된 것도 오직 엄친의 명에 무조건 순종한 나의 처숙부님의 놀라운 효성의 소산이라 하겠다.”

1990년대 후반 아버님께서 칠순 무렵에 쓰신 기록이다. 미카엘 할아버지의 맏아드님이, 지금은 고인이 된 김경식 보니파시오 몬시뇰이고, 두 분 따님이 수도자로 생활하고 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오는 27일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본 히로시마를 방문한다. 지난달 4월 11일에는 케리 국무장관이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찾아 원폭 희생자 위령비(慰靈碑)에 헌화했다. 두 미국 정부 최고위 인사의 참배(參拜)는 일본 정부의 강력한 요청을 미국이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지만 요즘 국내 언론은 이 문제를 크게 다루고 있다. “‘히로시마 사태’는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나라와 원자폭탄을 맞은 나라, 선전포고 없이 기습한 나라와 기습당한 나라가 벌이는 합동 정치 쇼다. …한국은 히로시마 평화 쇼의 국외자(局外者)가 아니다. 히로시마 희생자 16만명 가운데 3만명이 강제 징용 당했거나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현해탄(玄海灘)을 건넜던 당시의 조선인이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 희생자 7만명 속 1만명도 조선인이다”(2016.5.13., 조선일보 ‘강석천 칼럼’).

필자는 지난 2005년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 원폭투하 60주년 행사에 직접 참석한 일이 있다. 그때 일본 사람들은 미국에 피해를 본 것을 강조하고 있었는데, 자기네들이 저지른 전쟁도발에 대해서는 왜 지금도 고개를 돌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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