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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瑞午 칼럼]영천 출신 주교와 사

  • 채널경북 webmaster@channelkb.co.kr
  • 입력 2016.05.06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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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오 최 홍 준 본지 논설고문 방송작가, 중앙초등 7회 졸업 전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단체 협의회장
 

가톨릭교회에서 주교(主敎)는 온 세상의 지역 교회들을 맡은 사도들의 후계자이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전해야 할 교회의 사명을 책임진 주교들은 가르치고, 거룩하게 하며(성사와 희생 제사를 통해), 백성의 지도자, 곧 사목자가 되는 삼중 기능을 행사한다. 상주하는 주교는 지역교회나 교구를 맡아 교구장이라 불리며, 교황을 단장으로 해서 공동체를 이루는 단일한 주교단의 일원으로, 전체 교회를 사목하는 주체이며, 교황과 수직적으로 일치하고, 수평으로 결속하여 친교의 공동체를 이룬다.

온 세계 교회를 일컫는 보편교회의 으뜸은 교황이고, 각 지역교회의 책임을 맡은 이는 교구장 주교이다. 최근 원주교구장(조규만 주교)과 마산교구장(배기현 주교)이 새로 임명돼 5월에 착좌식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우리 영천 천주교회도 한 분의 주교와 꽤나 여러 분의 사제들을 배출하고 있다.

영천시 최무선로 236에 자리잡은 영천성당 정문 담벼락 안 왼쪽에 아직 국기게양대가 서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자리에 세 칸짜리 집이 한 채 있었다. 방 둘에 부엌이 딸린 목조건물로 기억한다. 이 집에 방학이면 두 사람의 신학생(神學生, 사제수업을 받는 학생)들이 살았고, 바로 그 집에 우리 집 네 식구가 잠시 거처한 일이 있다. 해방둥이인 내 아우가 갓난아기였을 때이고 보면, 6·25 훨씬 전의 일이었던 모양이다. 하루는 잠에서 깨어보니, 아직 잠들어 있는 아기와 나 둘 뿐이고, 어머니, 아버지가 안 계시는 거였다. 그래서 “으앙!” 울음을 터뜨리면서 성당 안으로 뛰어들었고, 아버지에게 덥석 붙잡힌 나는 그만 혼쭐이 나고 말았다.

우리 친가 쪽으로는 가톨릭 신앙을 가진 내력이 길지 않지만, 외가는 오래 된 구교우(舊敎友) 집안이다. 그래서 낙동강변인 왜관읍 낙산동 가실성당이 있는 외가에 가게 되면 나더러 “너 신부님 될 테야?”하고 물어보는 어른들이 많았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준비해 놓기라도 한 듯이 “저는 맏이라서 안 가고요, 내 동생 레오가 신학교에 갈 겁니다.”라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면 어른들은 아우를 환대하며 “최 신부님, 최 주교님!”하며 장래를 축복해주는 것이었다.

위에서 말한 두 사람의 신학생들 가운데 1950년 4월 15일 사제로 서품된 장병보(蔣柄補, 베드로, 1922-1983) 신부는 그분 아버님이 조교공소(早橋公所) 회장을 지내셨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와 가깝게 지낸 어른이시다, 진해성당 주임으로 부임한 장 신부님이 다니러 왔을 때 어린 내가 그 댁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성무일도를 바치고 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1953년 미국 유학생활을 시작한 결실로 1961년 2월 워싱턴가톨릭대학교에서 교회법박사 학위를 받고, 세인트 마이클즈 아카데미 교수로 재임하다가 1961년 10월 귀국해 현재의 ‘가톨릭신문’ 전신인 <가톨릭시보> 주간과 대건중고등학교 교장, 교구 상서국장, 대건신학대학 교수, 효성여자중학교와 고등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또 한 분은 제2대 부산(釜山) 교구장을 지낸 이갑수(李甲秀, 가브리엘, 1924-2004) 주교로서 1938년 영천보통학교 졸업생이다.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10월 28일 성신대학을 졸업한 뒤 계산동 주교좌성당에서 대구교구장 최덕홍 요한 주교의 주례로 사제품을 받았다. 부산 범일동 보좌를 거쳐 1952년 9월 도미, 마케트 대학교와 포담대학교에서 수학해 1957년 사회학 석사를, 1961년 2월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 후 대구대교구장 비서와 학생 지도신부, 효성여자대학과 경북대학교 강사, 신목고등학교(소신학교) 교장 등을 지내다가 1971년 8월 부산교구 보좌주교, 1975년 7월 17일 부산 중앙 주교좌성당에서 제2대 부산교구장으로 착좌했던 것이다.

영천성당은 1950년에 두 분 사제가 배출된 후 오랜 동안 후배 사제가 나오지 않다가 마침내 26년만인 1976년 5월 3일 최홍길 레오 부제가 사제품을 받고, 같은 달 6일 영천성당에서 첫미사를 봉헌했다. 올해로 40주년이 된다. 필자는 아우가 사제로 서품된 바로 다음날인 5월 4일 대구 복자성당에서 혼인했는데, 아우 사제 주례로 친척 등 다섯 분 사제가 합동으로 미사를 집전했다.

영천출신 사제들 가운데 가톨릭신문 주간, 또는 사장을 지낸 분이 세 분인데, 장병보 신부와 최홍길 신부, 황용식 신부가 그들이다. 이 밖에 김상규 신부와 나의 사촌 아우인 최홍덕 신부, 그리고 채창락·김정환·김병진·채홍락·박철·이종엽 신부가 있다. 그리고 영천성당과 금호, 신녕, 임고본당 등 4개 성당이 있어 풍요롭다. 한편, 영천보다 훨씬 먼저 1905년 화산면 용평동에 공소로 출범한 용평본당이 1907년 설립됐으나 오래 가지는 못했고, 이곳 출신 사제로 김승연, 김계용, 김준필, 박동준 신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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