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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나누미칼럼]납월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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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2.10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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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나누미스토리텔링연구원 김 정 식 원장
 


실타래 같은 자운영 파란 덩굴이 새삼스럽게 강둑을 에워쌌다. 몇 차례 된서리를 뿌리면서 겨울이 성큼 들어앉았지만 풀꽃들은 제 계절을 잊은 듯 하다.

강둑이 멎는 곳에서 곧장 산길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실선 같은 산길은 초입부터 온통 붉은 카페트를 깔아놓은 듯 단풍잎 포도를 만들었다. 며칠 째 내린 겨울비에 젖은 낙엽들이 가로로 세로로 자유롭게 누운 채 동장의 모습을 선연하게 드러냈다. 그런데 웬 일인가. 잎이 마른 야생 매나무에서 한 떨기 붉은 꽃을 쏙 내밀었다. 홍매다. 하얗게 눈이 내릴 것 같은 산자락에서 세한의 겨울을 기다리리라 하고 미리 내치는 고고한 소리로 꽃을 만들어 낸 것만 같다.

산은 정직하다. 제 몸이자 삶의 전부이던 푸른 잎을 벗어던진 빈 나뭇가지 위로, 피를 토하듯이 온산을 붉은 정열로 물들게 하던 단풍이 진 자리 위로, 서서히 하얀 설화가 피어나더니만 어느새 깡마른 가지에서 연두빛 새 잎을 피우고 금새 눈부시게 무성해진다. 그러다가 또 그 풍요로움을 다 내리고 허허롭게 겨울을 맞는다.

이 계절의 그 빈 가지를 보고 있노라면 자꾸만 채워가는 우리네의 살림살이와 거꾸로 간다는 생각이 든다.

찬바람을 이기고 섣달에 피어난 그 매화를 정녕 납월홍매라 한다. 내 맘이야 매일 봄이련만 소한, 대한을 저만큼 앞둔 채 벌써 봄소식을 알려주는 세한의 귀태를 말이다.

주칠을 한 듯 그 붉은 홍매의 꽃 잎 속에서 새해의 봄을 기다리는 나의 기쁨을 발견한다. 지난 해와 또 다른 나의 봄을 기다리는 환희가 묻어 있다. 기다리는 기쁨과 환희만큼 더한 길상이 어디 있으랴.
몇 년 전에 지인이 폴란드 어느 대학으로 떠났다. 장도에 오른 그에게 나는 문자를 보냈다. 두어해 지난 뒤에야 귀국할 그를 기다려야 하는 내 맘의 정감을 짧은 운율로 담은 것이다.

날 당겨 오너라 말하고 싶지만
나서서 반기지 못하는 묶인 맘
되올 날 기다림조차 죄가 되랴


기다린다는 것은 설레임이다. 아름답고도 간절한 몸짓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다림에 익숙해진다면 좀 느긋해 질 것이다. 기다림에 훈련이 되면 느림의 미감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내 서재에 작은 그림 한 장이 있다. 기다림 혹은 그리움을 그린 듯한 화가의 작품이다. 해가 떨어진 산촌에 어둠이 짙게 번져내리고 단 칸짜리 작은 지붕 위로 산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어둠과 까만 용두머리 기와와 산새의 잿빛 깃털이 일몰을 더욱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런데 산새가 앉은 기와지붕 선상으로 밝은 별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하늘과 지붕선이 마치 지평선처럼 뚜렷한 선형을 그린다. 밤이 깊어가자 그 선형은 더욱 뚜렷해진다. 기왓골에 앉은 산새는 고개를 쭉 빼들고 뭔가를 기다린다. 새벽을 기다리는 것일까. 별을 기다리는 것일까. 그리움의 서정이 절절이 배어있는 작품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일종의 심리적인 거리가 아닐까. 나와 상대 간에 심리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기다림은 절박해 질 것이다. 그리움으로 채워지는 거리다. 그런 친밀한 거리를 문화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물리적으로 45.7cm 공간이라고 했다. 그야말로 서로의 체온이 느껴지고 숨소리가 교환되는 가까운 거리다. 행복한 사람끼리의 거리다.

그런 이의 기다림에는 설레임과 아울러 아픔도 감내해야 한다. 그 모두 행복의 댓가다. 이미 홍매를 지켜 보면서 기쁨과 반가움을 만난 나는 내년 봄날을 위한 기다림으로 갚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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